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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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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105회 일치
         |혐의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뇌물수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강요·기밀누설 등<br>----<br>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뇌물수수·국고손실)<br>----<br>공직선거법 위반(공천개입)
         '''박근혜'''(朴槿惠<ref>{{헌정회|2530}}</ref>,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group="주">192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 대통령까지 포함할 경우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199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탄핵 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ref>{{웹 인용|url=https://www.ccourt.go.kr/cckhome/kor/event/adjuList.do|제목=선고목록 및 결정문 - 헌법재판소|확인날짜=2018-12-1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56&aid=0010429073|제목=[영상]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7-03-10}}</ref> 탄핵 후에는 곧바로 3월 21일 검찰에 소환되어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네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검찰 출석] 최순실 ‘곰탕’·이재용 ‘자장면’…박근혜는? 미리 준비한 ‘도시락’ |url=http://news.donga.com/3/all/20170321/83428508/2 |work=동아일보 |date=2017-03-21 |accessdate=2017-05-18}}</ref> 3월 31일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ref>{{뉴스 인용 |title='최순실 국정농단 공범' 박근혜 구속…"혐의소명·증거인멸"(종합)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30/0200000000AKR20170330171251004.HTML |work=연합뉴스 |date=2017-03-31}}</ref>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던 중에 2017년 10월 16일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었으나 검사가 앞선 구속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뇌물 공소사실에 대하여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기간이 최대 6개월 연장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하였고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ref>[http://biz.heraldcorp.com/culture/view.php?ud=201710171022138598395_1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정원]] 특활비 ·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전자는 2심, 후자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이다. 2018년 4월 6일 18개 혐의에 대한 1심에서는 혐의 16개에서 일부유죄 및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으며,<ref name=":0" />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ref name=":2" /> 2018년 7월 20일 혐의 3개에 대한 1심에서는 2개가 인정되어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받은 상태이다.<ref name=":1">{{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20/0200000000AKR20180720096900004.HTML|제목=박근혜 '국정원 특활비·공천개입' 1심 징역 8년…33억 추징(2보)|성=송진원|이름=|날짜=2018-07-20|뉴스=연합뉴스|출판사=|언어=ko-KR}}</ref> 2개 재판을 합치면 혐의가 총 21개, 형벌은 총 33년형과 벌금 200억 원과 추징금 33억 원이다.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단독 입수]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6709|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7-08-06}}</ref>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와 '줄푸세'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기강은 '''세'''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이 정책은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 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ref>[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07052913423936363&type=2 박근혜 바꿔야 산다.]<<[[머니투데이]]>> 2007-05-29 작성</ref> 이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3280135 李 “김정일은 만만치않은 터프가이” 朴 “줄푸세 운동해야”] <<[[동아일보]]>> 2007-03-28 작성</ref>
         === [[이명박 정부]] 시절 ===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갈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08년 5월 18대 총선 직후에는 당내외를 합쳐 50여명 정도였고, 2011년 6월 비공식적으로 90 ~ 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182 '월박' 바람, 수도권까지 흔든다] 시사저널</ref>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새누리당|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2009년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 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0911/e2009111317515896380.htm |제목=親朴 일부의원들 박근혜에 반기? |확인날짜=2009-12-0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28164146/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0911/e2009111317515896380.htm |보존날짜=2013-09-28 |깨진링크=예 }}</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9/pdf/289za0008b.PDF "제 289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본문|박근혜 정부}}
         박근혜는 2013년 4월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등 우경화 노선을 취하려 하자, "역사 인식이 바르게 가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 과거 상처가 덧나게 되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웹 인용|url =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제목 = 박근혜 대통령 "일본 바른 역사인식 없이 미래지향 관계 어렵다"|저자 = 이동훈|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4250950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보존날짜 = 2013-04-25|깨진링크 = 예}}</ref> 이후 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로 가면 동북아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 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고, 일본에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만큼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과 걸림돌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며 "정부는 항상 일관되게 원칙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f name="news.hankooki.com"/> 이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기후변화와 테러방지, 원전 문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부터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다자간에 더 큰 신뢰를 구축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즉 '서울 프로세스'를 내달 미국 방문 때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북한도 얼마든지 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뢰 쌓기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
         박근혜는 4월 3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경제활력회복과 세입정상화를 위하여 빠른 시일 내에 추경예산안을 편성하고 이것이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ref name="news.naver.com"/> 또한 주택시장 정상화 대책에 관련해 입법의 마무리와 수출·투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중소기업을 위한 '엔저' 대책도 주문했다.<ref name="news.naver.com"/> 그러면서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서민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민행복기금에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논란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ref name="news.naver.com"/>
         박근혜는 취임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 언급<ref>[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966 [박근혜 정부 출범_취임사로 본 국정운영] 경제부흥ㆍ국민행복ㆍ문화융성…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가동]</ref>한 이래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ref>[http://www.korea.kr/celebrity/contributePolicyView.do?newsId=148757873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기반 구축]</ref> 가 대표적인 통일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2015년이 되자 김정은은 탈상 3년을 계기로 고위급 접촉 재개는 물론 남북 정상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신년사를 밝힌 데 이어<ref>[http://imnews.imbc.com/replay/2015/nwtoday/article/3591606_14782.html 김정은, 남북 정상회담 언급…南 "진전된 자세" 화답]</ref> 1.20 북한 정부·정당·단체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남북 대화 촉구 호소문을 청와대, 대한적십자사 등에 보내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대북전단 살포 중단 및 한미훈련 중단 등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ref>[http://news1.kr/articles/?2057625 北 남북대화 촉구 호소문 청와대 등에 전달]</ref>
         2013년 2월 25일, 박근혜는 취임식과 함께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 명칭은 별명 없이 그냥 '''박근혜 정부'''로 결정되었다.
         박근혜는 곧바로 조직 개편에 들어갔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폐지했던 부총리직을 다시 만들었다. [[해양수산부]]를 신설하였고 교육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미래창조과학부]]로 개편하고, 외교통상부를 외교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국토해양부를 국토교통부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지식경제부를 산업통상자원부로, 농림수산식품부를 농림축산식품부로 개편하였다.
         개성공단에 관해서도 문제는 계속되었다. 결국 4월 26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하였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제목 = 정부 "개성공단 남측인원 전원철수"…폐쇄 위기|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04-26|확인날짜 = 2013-04-27|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531115855/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74161_5780.html#|보존날짜 = 2013-05-31|깨진링크 = 예}}</ref>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1.kr/articles/1109709|제목 = 개성공단 126명 1차귀환 완료..29일 전원철수(종합)|저자 = 조영빈|날짜 = 2013-04-27|확인날짜 = 2013-04-27}}</ref>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479593|제목 = 北 개성공단 마지막 체류 50명 중 일부만 귀환 허가(1보)|저자 = 박지환|날짜 = 2013-04-29|확인날짜 = 2013-04-29}}</ref>
         2013년 12월 정부세종청사에서 모두발언 중인 박근혜
  • 홍진 . . . . 34회 일치
         |직책 =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장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적 = [[대한민국 임시정부]]
         '''홍진'''(洪震/洪鎭, [[1877년]] [[10월 3일]]([[음력 8월 27일]]) ~ [[1946년]] [[9월 9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1926년]] [[7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제5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아명은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 [[호]](號)는 '''만오'''(晩悟). [[충청북도]] [[영동군]] 출생.<ref>[[한성부]] 출신설도 있다.</ref> [[1946년]]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 입원 중 남상철의 권고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 align="center" colspan="2"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8대 국무령
         | align="right" colspan="2" | [[파일:Logo-14.png|10px|]]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 목록|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대 수반]]
         [[1898년]] 법관양성소<ref>[[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ref>를 졸업한 뒤 [[평리원]](平理院)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변호사가 되어 경성부와·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를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연락책임을 맡아 활동했고, 4월에는 [[한성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가하여 법무차장이 되었다. 그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법제위원장으로 헌법 개정, 국무위원 개선 등 제도 정비에 노력했다. 11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했다. [[1921년]] 4월 장붕(張鵬)의 뒤를 이어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이 되었고, 5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해 8월 대(對)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의 간사장이 되어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며, 의정원 의원 25명의 연서로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다음해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여운형]](呂運亨)·[[김구]](金九)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1926년]] 7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의 진작, 전민족대정당의 창당, 피압박민족과의 연맹 체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정 3대 강령을 발표했다. 임시정부를 강화하고자 노력했으나 독립운동단체들간의 분규가 계속되자 그해 12월 국무위원들과 함께 사직하고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베이징]]·[[우창]]·[[난징]]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해말에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장 및 군민회의(軍民會議)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문이 되었으며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3당 통합되자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어 한국광복군의 창설에 이바지했다.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 명예이사로 선출되었으며, 국무위원회 고문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직하면서 [[8·15 해방]]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 [[3월 17일]] [[한성오]]의 집에서 한성정부를 조직.
         :* [[4월 15일]] [[이규갑]]과 함께 한성정부의 각원 명단과 문건을 가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압록강을 건너며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꿈.
         :*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됨. 취임을 미루던 국무총리 [[이동휘]]를 찾아가 취임을 종용.
         :* 11월 임시정부 국내조사위원 및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에 임명.
         * 임시정부 법무총장,내무총장 등 역임
         :* [[8월 30일]] 정부를 구성하고, 홍진 정부가 공식 출범.
         :* [[9월]] 임시정부 시정방침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1.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 을 진작함. 2. 전민족 대당체(大黨體)를 건립함. 3. 각 피압박민족과 대연맹 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 4. 국교를 증진함)
         :* [[10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
         :* [[10월 25일]] 임시정부 내무장으로 선임.
         :* [[10월 8일]]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
         * [[1945년]] [[11월 5일]] 한국 해방에 따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
  • 로힝야 . . . . 28회 일치
         [[미얀마]]의 [[소수민족]]. 미얀마 정부에서는 '벵갈리'라고 부른다.
         미얀마 정부는 이들이 영국 통치 이후 미얀마에 이주하게 된 방글라데시 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방글라데시 불법이민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미얀마 정부는 '벵갈리'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를 차별하는 배경에는 [[종교]]가 있는데, 미얀마 [[불교]] 신도들의 '반 이슬람' 감정이 강하기 때문이다.
         2012년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은 로힝야 문제에 대하여 해법을 제시하였는데, “유엔난민기구(UNHCR)가 운영하는 난민캠프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만약에 이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로 보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사실상 '추방' 선언이었다. 미얀마 정부는 여성이 한 번 출산하면 아이를 3년 동안 갖지 못하며, 무슬림과 불교도의 결혼을 제한하는 법률을 발표했다. 이 법률은 로힝야를 겨냥한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
         2014년 미얀마 정부는 "라카인 행동계획"이라는 정책을 제시했는데,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48년 이전부터 미얀마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벵갈리'라고 등록하면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힝야 가운데 상당수는 1948년 이전부터 거주했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사실상 추방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벵갈리'라고 부르며 방글라데시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로힝야를 꺼려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유엔난민기구가 인정하는 로힝야 난민이 3만명 가량 있으며, 유엔 난민촌 주위에는 미등록 난민 20만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2012년 방글라데시는 [[국경없는의사회]] 등 국제 구호단체의 활동이 난민 유입을 증가시킨다는 이유로 사업 중단을 요구했으며, 국경 순찰을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 비슷하게 방글라데시-미얀마에 분포하는 소수민족인 라카잉 족도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로힝야를 싫어한다. 라카잉 족은 불교도이다. 미얀마에서 분리독립을 노리는 라카잉 족 계열 아라칸 무장단체가 버마족 중심의 정부와 협력해서라도 로힝야를 때려잡겠다고 생각할 정도.[[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37086.html 참조]]
         이러한 사건이 보도되어 타이 정부는 로힝야 뿐만 아니라 미얀마, 라오스 등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신매매와 이들을 이용한 불법조업 어선의 강제노동 문제로, 국제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타이에 인신매매 최하등급을 적용하고, 유럽연합은 불법 조업이 6개월 안에 개선되지 않으면 무역제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타이 경찰이 움직여서 인신매매 조직을 단속했는데, 2015년 5월 1일, 타이 경찰은 말레이시아 국경에 가까운 타이 남부 송클라 지역의 밀림에서 인신매매 캠프에 억류되어 있다 숨진 로힝야의 시신 26구를 발견, 그리고 며칠 뒤 해골 몇 개를 더 발견했다. 타이 경찰의 추적에 따르면 인신매매 조직은 타이 남부 지역의 유력자들과 유착되어 있으며, 타이 언론에서는 군 장성이 연류되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5월 24일에 말레이시아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타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말레이시아 북부에서도 로힝야 감금 캠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타이 정부가 인신매매 단속을 강화하자, 인신매매범들은 이번에는 로힝야를 태운 난민선을 그냥 버리고 도망가 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정부는 서로 난민선을 쫓아내다가 일단 구조하기로 하고 3천명 가량의 난민이 구조되었으나, 많은 로힝야 난민들이 사망하거나 바다에서 실종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기원에 대해서는 미얀마 정부 측과 로힝야 측의 주장이 다르다. 미얀마 정부 측은 [[영국]]이 1824년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서 식민통치를 시작한 뒤, 똑같이 영국의 식민통치 지역이었던 방글라데시에서이 이주해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오는 불법이민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는 뜻에서 '벵갈리'로 부른다.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박해는 20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1962년 군부 쿠데타 집권한 네윈 정권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버마족과 다수 불교도 위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소수민족 탄압이 본격화 되었다. 1978년 네윈 정권은 무슬림 반군 토벌을 명분으로 하여, ‘킹 드래건 작전’ 을 펼쳐서 로힝야를 대규모로 체포했다. 로힝야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피난갔으나, 방글라데시에서도 지원을 별로 받지 못하여 1만 2천명이 아사나 병사했으며, 생존자는 미얀마로 송환됐다.
         1982년에는 시민권법이 개정되어, 로힝야는 미얀마 국적도 박탈되었다. 1982년 시민권법은 미얀마 국민을 ‘태생시민’(Citizen), ‘제휴시민’(Associate Citizen), ‘귀화시민’(Naturalized Citizen)으로 분류하는데, 태생시민은 미얀마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종족과, 미얀마-영국 1차 전쟁이 있었던 1824년 이전부터 현재의 미얀마 영토에 거주했던 조상을 둔 주민에게 부여된다. 미얀마 정부는 130개 이상의 소수민족을 인정하고 있으나, 공식 종족으로 포함되지 않아 시민권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2012년에는 라카인주에서 불교도 라카인족과 로힝야족이 충돌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로힝야 남성이 라카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소문 탓에 촉발되어 200명 이상이 숨졌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로힝야였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는 보고서를 출판하여 이 사건을 비판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미얀마 정부와 군부, 불교 승려들이 라카인족이 로힝야를 살해하도록 선동하고 방조하는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버마무슬림협회와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이 폭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동원된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미얀마 정부가 밝힌 공식 사망자는 43명, 모스크 37곳과 건물 1300여채가 불탔고, 1만 3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버마무슬림협회는 사망자가 70~100여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천명의 난민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하였으며, 방글라데시 경찰은 난민이 2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23일 미얀마 대사를 불러서 정식으로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역시 우려를 표시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시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항의 시위를 벌일 정도로 감정이 악화되었다.
         미얀마 정부는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를 부인하였으며, 저 타이 미얀마 대통령실 대변인은 유엔의 주장을 부정하고, 확실한 증거에 기반하여 발언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미얀마 군부와 정부는 민가 방화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려는 로힝야 무장세력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12월 19일, 이 문제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주변국 외무장관과의 회담과 더불어, 미얀마 정부는 국영 언론을 통하여 작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리는 한편 작전 지역을 공개하고 교도통신, EPA 등 외신도 불렀다.
         국제위기그룹의 보고서는 로힝야 무장단체가 국제무장세력과 연관이 있으나, 미얀마 내 불교도를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차별을 끝내고 시민권을 확보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종교적 주장을 펼치는 단체이고 국제 지하드 조직과 연결이 있어 언제나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미얀마 정부가 군사작전에만 치중하지 말고 로힝야의 고통을 외면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석도 있는데, 미얀마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80∼1990년대 방글라데시 인근 접경지대에서 활동했던 무슬림 무장단체 '로힝야 연대기구'(RSO)와 연계한 신생단체 '아카 물 무자헤딘'이 배후이며 파키스탄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하비드 투하르(일명 아르푸 하마드 줄루니)가 리더이고, 그를 돕는 12명의 극단주의자가 로힝야 주민을 선동하고 훈련시켜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사실상 미얀마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 겸 외교장관에 대해서 비판이 쏟아졌다. 2016년 무장공격과 이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보복에 대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녀가 군사작전이 시작되고 6주가 지나도록 언론을 피하고 "법치에 근거하여 군사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원론적인 해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에서 아웅산 수치는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다. 수치는 로힝야를 '벵갈리'라고 부르며 이방인 취급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 정호용 . . . . 24회 일치
         |내각 = [[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김정렬 내각]]
         |내각2 = [[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노신영 내각]]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자원 입대한 이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5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1기)하였다. [[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동기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가담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 [[대한민국 육군#역대 참모총장|제25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 위원,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과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에서 군부 인맥의 서열 3순위였으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무렵 노태우와의 경쟁 끝에 몰락하였다.---노태우와 정호용은 경쟁한적이 없습니다. 정호용은 김윤환과 더불어 노태우의 최측근으로 6공의 실세중의 실세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자였던 [[김영삼]]의 지지 유세를 하였습니 그러나 1995년에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12.12 군사 반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로서 1997년 4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내란 중요임무 종사로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됐다. 본관은 [[연일 정씨|연일]](延日)으로 호는 목우(牧牛)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사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파일:Roh Tae-woo - cropped, 1989-Mar-13.jpg|섬네일|right|150px|정호용의 육사 동기인 [[노태우]]]]
         1987년 1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지라 오래 재직하지 못했다.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88년 5월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에 임명, 같은 해 [[대한민국 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는 대구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 5·18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5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ref>1990년 1월 5일에 사직했다.</ref>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 문민 정부 출범 이후 ====
         1992년 다시 [[대한민국 제14대 총선|14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후에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우리가 남이가"(경남 출신 김영삼과 정호용의 출신 지역인 [[경상북도]]인들은 동향인이라는 뜻)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경북에서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과거청산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가 확정되었다.
         ====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던 이후, 그 해 [[광복절]]에 정부에게 12·12, 5·18 관련자를 사면받으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에 종친인 [[정몽준]]의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 방경일,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술 (방경일, 너와나미디어, 2002)
          |제목 = 역대 정부부처 장차관 - 내무부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10/24/200510240500031/200510240500031_1.html 《신동아》 독점 인터뷰 - 5·6공 주역, 정호용 전 국방장관 : "나는 친구 노태우에게 배신당했다"]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민주정의당]][[분류:박정희]][[분류:노태우]][[분류:김영삼]][[분류:하나회]][[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남산초등학교 동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고급부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 김재규 . . . . 23회 일치
         ||<:> '''수상''' || ~~[[대한민국 훈장|충무무공훈장]]~~[* 삭선이 그어진 것은 서훈이 취소되었기 때문. [[2006년]] [[3월 21일]] 정부는 서훈을 취소할 수 있게 개정된 상훈법 규정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 및 기업인 174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10·26사태의 주범인 김재규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되어 8개 훈·포장을 박탈당하였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38076|기사]] ] [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천수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삼일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국선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광복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통일장~~[br]~~[[대한민국 훈장|청조근정훈장]]~~[br][[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 아지즈 훈장[* 당시 건설부장관으로서 몸소 중동에 방문해 (한국 기업을 통한) 중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획득했다.] ||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07473&viewType=pc|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 [[파일:walderppk-20161228-150640-001.jpg|width=600]][[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2800209105001&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10-28&officeId=00020&pageNo=5&printNo=22327&publishType=00010|출처]] ]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했으나 거절당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191&viewType=pc|출처]] 이는 그가 권력욕에 취해 [[10.26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거로 쓰인다.]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 '''열사'''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김재규 묘비에도 의사(義士)로 적혀 있다.]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결과는 좋았다|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 옹호든 비판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등은 김재규 부장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당시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와 말년의 박정희는 대한민국은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는 망상에 가까운 신념이 있었기에 김재규가 10. 26 사태를 단행하지 않았다면 박정희 역시도 여타 독재자처럼 말년이 비참했을 것이고 후세의 평가도 좋지 못했을 것이다.] 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의해 투쟁해온 이들과 동일시 할 수 없는게 애초 김재규는 박정희와 친형제 같은 사이였고 중정부정이라는 대통령 다음가는 2인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10.26 단행 이전의 행보를 보더라도 정보수집과정에서 유신정권도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박정희도 말년에는 20년 절대 권력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도 10.26 단행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는 차지철, 이후락 같은 다른 유신인사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국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근데 전두환 노태우꼴을 보면 심판도 안받았을 확률이 높다---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또,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많으면 수만에서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을 대신 이루어준 것이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요약: "비록 김재규가 박정희 정권에 충성하며 부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민주화는 10년, 20년 미루어지거나 심지어 아직도 박정희의 [[차지철|후]][[전두환|계]][[노태우|자]][[박근혜|들]]이 [[북한|북쪽]]마냥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주장.'''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8/2017052801948.html?Dep0=twitter&d=2017052801948|#]]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 측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76|#]]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http://www.usjournal.kr/News/6936|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15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8-15&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14&publishType=00020|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906/57493166/1|출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 시간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 물론 시간이 배로 걸린다는 전제가 붙는다. 실권을 쥐고 있는 핵심 요직원들과 군부쪽 인사들은 확고한 박정희 지지자이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걸리긴 하다.]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을 가지며 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박근혜정부]]가 집권한 이후 김재규 재평가론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는데,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 컨텐츠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유행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재규 드립을 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드립이었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헌데 이러한 유머 소재로써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에게 언급되는 일이 많아지며 김재규 본인과 당시 사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게 된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었다. 김재규가 인지도를 얻으면서 그가 살아생전 남긴 글과 행적들 역시 진지하게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 이로 인해 김재규는 평소에도 민주주의와 민주개혁세력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들을 알게 모르게 도와왔다는 사실, [[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살극이 벌어질 뻔한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사실 등이 알려지며 김재규 지인들이 밝힌 미담 등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지한 재평가"에 대한 정보들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최소한 2015년 전후부턴 이런 평가가 인터넷상에선 베플 등으로 진지하게 퍼져가던 시기. 덕분인지 10.26에 대한 평가 자체도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데, 이전까진 박정희 사망일이라는 것이 좀 더 부각되었다면, 이때쯤부턴 김재규 의거일을 기념하는 분위기가 SNS 등을 중심으로 더 활발해진다.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 예편과 비슷]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 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정부수립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전부 좋지 않은건 아니고 광복군출신과 일제 순사출신과의 사이]
          현재는 관련된 원문이 삭제되어 짤만 존재하는 상태.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는 장면. 이말년 시리즈 하차 이후 [[이말년 서유기]]를 연재하기 전 삼국지를 검토한 적이 있고 그 중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이말년 집 침대에 장식되어 있다 [[카더라]]. 이말년은 이것 말고도 [[전두환]]과 [[노태우]]로 [[패러디]]한 이각과 곽사가 김재규로 패러디한 여포를 낙양성에서 쫓아내는 그림도 그렸다. 실제 역사와도 유사한 게, 여포(김재규)가 동탁([[박정희]])를 죽였으나, 정작 이후 이각과 곽사([[전두환]]과 [[노태우]])가 권력을 잡게된다.
          [[김병기]]가 연기한 김재욱 중정부장. 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차지철]]을 참고한 역할인 장철환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 장철환이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려 하자 [[차수혁]]([[이필모]])이 "김 부장은 각하와 동향([[경북]] 선산)으로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진언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김재욱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죽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강기태(빛과 그림자)|강기태]]([[안재욱]])를 뒤에서 지원해준다.
  • 스페인 제2공화국 망명정부 . . . . 19회 일치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가 패배하고, 프랑코 독재정부가 세워지자 스페인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제2공화국의 주요 인사들이 국외로 탈출하여 세워진 [[망명정부]].
         1940년,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프랑스를 점령했다. 나치는 프랑코 정부와 같은 파시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를 지원하여 공화국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당연히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는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서유럽에 망명하고 있던 많은 공화파 망명자는 정치범이 되어 나치 독일에 끌려가 수용소에 갇히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망명정부는 곧바로 [[멕시코]]에서 재건되었다. 이 당시 멕시코는 좌파 정당인 제도혁명당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스페인과 같이 스페인어가 주로 쓰이는 멕시코에는 다수의 공화파 망명자가 있었고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를 여전히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또 전쟁 중에 총리 후안 네그린은 [[영국]]의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런던에는 나치 독일의 유럽 점령 때문에 이 같은 망명정부가 많이 생겨나서 정말 망명정부 천지였다.
         1945년,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의 길을 걸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보게 되자 공화파 망명자들은 굉장히 기뻐하였는데, 연합국의 승리에 따라서 프랑코 정부가 무너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시즘 세력에 점령된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해방되었고, 나치 독일과 동맹하던 파시즘 정권은 패망하는 나치 독일과 함께 붕괴하였다. 스페인과 같은 처지가 되었던 망명정부들도 대부분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다만 동유럽 지역은 소련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공산화 된 폴란드는 망명정부를 지속했고,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의 게릴라가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귀환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페인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코 정권은 전쟁 중에 독일에 의용군을 보내는 등 상당히 친나치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나, 명목상은 [[중립국]]이었고 전쟁 말미에는 의용군을 귀국조치 시키며 망해가는 히틀러와 거리를 두었고 연합국과는 협상을 벌였다. 결국 연합국은 스페인까지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코 정권은 전후에도 계속 파시즘 체계를 유지될 수 있었다. 희망이 좌절되자 공화파 망명자와 망명정부는 매우 낙담하였다.
         1946년,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는 [[파리]]로 다시 옮겨갔다. 여담으로 바스크 망명정부와 카탈루냐 망명정부(…)도 파리에 설립되어 있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르고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1977년에 공화국 망명정부는 왕정복고를 받아들이고 해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화해의 뜻을 보이는 제스쳐로서 망명정부 인사들을 마드리드에서 환영해주었다.
  • 조응천 . . . . 17회 일치
         || '''약력''' ||<(> 대전지방검찰청 검사[br]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br][[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br]부산고등검찰청 검사[br]수원지방검찰청 부장검사[br][[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관[br][[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br][[박근혜정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br]~~별주부짱 매니저~~[* 공직을 맡은 것이 아니라 취소선을 쳤지만, 이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공직기강비서관에서 잘린 뒤에 그는 아내와 같이 해물전문점을 운영했었기 때문이다. 즉, 당선될 당시 그는 자영업자였다. 이는 그의 총선 포스터에도 당당하게 적어 놓은 약력이다.][br][[더불어민주당]] 원내부대표 ||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며 전직 자영업자. 그리고 '''[[문재인]]의 남자 2호'''[* 남자 1호는 [[김병기(정치인)|김병기]] 의원이라고 한다. 김병기 의원의 경우 자신이 친문 인사임을 스스럼 없이 인정하고 있지만 조응천 의원은 [[TV조선]] '박종진 라이브쇼'에 출연해 ~~물론 말로만~~ "나는 친문 인사는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재인]]의 아픈 손가락'''[* [[문재인]] 대통령은 당대표 사퇴 후인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병기와 조응천 두 사람을 본인의 아픈 손가락으로 꼽으며, [[박근혜정부]]에서 핍박 받은 두 후보를 반드시 당선시켜 달라고 직접 트위터에서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 다 지역구에서 당선되었으며, 훗날 요긴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김병기(정치인)|우병기]] [[조응천|좌응천]]~~ ~~최초의 셔터맨 출신 국회의원~~
         [[대경권|TK]] 출신 엘리트 검사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요직을 맡아 성장했고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등 [[대경권|TK]] 성골 엘리트급의 보수 인재 루트를 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적당히 끊고 청와대에서 나왔다면 지금쯤 구 새누리당에서 요직을 맡아 보수층의 중심에 올랐을테고, 계속 해서 청와대에서 자리를 맡았다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축출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정윤회 문건 사건]]으로 인하여 축출돼 '''별주부짱'''이라는 이름의 [[횟집]]을 운영하며 중앙 정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는, 드라마틱한 이력을 갖고 있다.
         [[김대중 정부]] 때는 검사 신분을 유지하면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가 2005년 검사직을 사임하고 [[김앤장]] [[변호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후기인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법무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하였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원장|원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변호사]]로 돌아갔다.
         2013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전문위원으로 [[박근혜정부]]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하였다.
         요약하자면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 [[참여정부|노무현 정부]], [[실용정부|이명박 정부]], [[박근혜정부]]까지 4개의 정권에서 요직을 맡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4개의 정권은 이념과 성향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본인이 선거 홍보물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꾸준히 중용될 정도로 능력과 도덕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전의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반정부 성향이 강해진 인터넷 여러 커뮤니티들에서 이러한 조응천의 드립은 다시금 주목받았고, [[주갤]]에서까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tock_new1&no=4508912|통쾌하고 호감간다는 말들이 나왔다.]] 애초에 더민주에서 이 사람을 영입한 가장 큰 이유가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다는 이유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을 수년 전부터 접했던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공직상 기밀 누설 혐의로 형사소추 당하지 않는 선에서 청와대, 검찰의 대응 플랜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분석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서[* 특히 [[문고리 3인방]]과 [[우병우]]에 대한 반감이 글에서 드러난다. 아무래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사건 때문이다.]]] 현재 정국에서 관심도가 매우 높은 의원 중 하나.
  • 허목 . . . . 17회 일치
         [[과거 시험|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으며 [[조선 효종|효종]] 사후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조선 효종|효종]]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인선왕후]]의 1년복이 채택되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된 뒤 [[1675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특별 승진하여 그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 [[사복시]]제조를 지냈다.
         [[이황]]과 [[조식 (1501년)|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 (1543년)|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정구 (1543년)|정구]] 사후 그의 수제자인 모계 [[문위 (조선)|문위]](文緯)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ref>윤홍식·오병문, 2006,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ref> [[서예]]의 대가였으며 [[전서체]]에 능했다. 사후 [[1689년]] 복관되고 왕명으로 저서가 간행되었으며, [[1692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미수 허목은 [[1595년]](선조 28년) 또는 [[1593년]](선조 26년) [[12월 11일]] [[한성부]] 창선방(彰善坊)에서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허교]](許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딸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는 동애 [[허자]](東厓 許磁)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증조모 전주이씨는 왕족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였다. 할아버지는 퇴계(退溪)가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松湖處士) 허강(許橿)이고, 할머니 진주강씨는 문량공 [[강희맹]](文良公 姜希孟)의 5대손이며, 사용(司勇) 강복(姜復)의 따님이다. 또한 할머니 진주강씨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자 정암 [[조광조]]의 동문인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종전 내용(아래 서술된 내용)과 관련하여 내용이 논리적이지 않은 점들이 있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합니다. 첫째, 미수 공은 서울 창선방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현감 이었고, 할아버니는 송호 강으로 역대사감 30권을 편찬하였고, 증조 할아버지는 좌찬성 이었습니다.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관직으로서 정 2품인 6조 판서보다도 높은 벼슬입니다. 미수 공의 가계 자체가 청렴 결백한 가계이기에 부유한 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더우기, 앞에서도 논의된 바와 같이 증조모가 왕족이고, 어머니 또한 그 유명한 백호 임제의 따님입니다. 또한, 선대에도 벼슬하신 분들이 많고, 명문벌족의 자손이기에, 많은 선비들이 집안에 왕래를 하고 이에, 미수 공은 그 인연들로 인해 유명한 분들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유명한 가계에서 왜 혼처를 찾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하여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습니다.) 두번째로, 오리 이원익 대감이 나이든 손녀 사위감을 찾고자 분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손자도 아닌 손녀의 혼처를 왜 할아버지가 적극 찾아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보다는 부모가 딸의 혼처에 대해 더 관심이 많겠지요. 손주(아들)이라고 하면, 가계도 이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적극적으로 혼처를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오리 이원익은 예전부터 허목의 조부 증조부와도 잘 아는 사이 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퇴청길에 아이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아 이름과 가계를 물어보니, 본인이 잘 아는 집안의 아이였고, 이에 손녀 사위로 삼아야 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손녀와 허목 모두 나이가 어리기에 미리 혼담이야기를 하여 훗날 혼사를 하리고 약조를 해 두었던 것입니다. 오리 이원익 정승의 아들과 며느리가 좀 더 넉넉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 보내고 싶었기에 처음에 반대했던 것은 전해 오는 내용이 같습니다. 즉 오리 이원익 대감이 청백리 입니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지만 집안 살림이 아주 넉넉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의 유명한 청백리가, 황희 정승과 오리 이원익 정승이지요. 따라서 오리 대감의 아들 내외는 명문벌족 집안이나 역시 청렴하고 강직한 허목 집안 보다는 좀 더 부유한 다른 집안으로 딸을 출가시키기 원해서 처음에 반대를 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문장 "[이원익]에게는 결혼을 해야 할..." 중 4번째 줄에는 오리 정승이 허목을 본인의 부인에게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서울 창선방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동학재임 시절 유생 중 한 사람인 박지계가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문란시켰다고 박지계를 유생명부에서 제명을 시키는 바람에 임금님으로 부터 화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재임 시절이 32세이니, 19세때 혼인을 하여 32세때에도 한양(서울)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버님이 현감으로 여러 고을을 사셨기에 이 곳 저 곳 방문을 한 적은 있지만, 두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하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는 합당치 않다는 것을 이야기 드립니다. 세번째로, 세번째 단락 둘째 줄에 묘사하고 있는 "... 처, 장인인 이의전 내외, 처숙모 등은 그가 가난한 집안 사람이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점을 들어 딸이 고생할 것이라며 반대..."에서 허목은 어려서 부터 많은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에 글월 문자가 있었고, 글씨, 그림등 모든 방면에 아주 능한 것으로 다른 문헌들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옛날 명문벌족 출신의 선비에게 무슨 재주가 필요합니까? 학문에 전념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줄 알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할 줄 알면 그 것이 최고 입니다. 즉 허목이 장사를 할 것도 아니고, 의술을 익힐 것도 아닌데 "재주가 없어 딸이 고생할 것 같아 반대를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이런 연유들로 인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하여 간략히 편집을 한 것입니다. 새 내용은, 미수공이 종손댁으로 미수공의 혼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미수 허목과 과련하여 바로 잡고자 하는 내용들은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편집을 하겠습니다. (끝)
         [[1655년]](효종 6) [[의정부]][[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 등의 천거로 [[윤휴]]와 함께 발탁되었다. [[우의정]] [[심지원]]은 "허목(許穆)·윤휴(尹鐫)가 힘써 배워 재주가 많으며 행실이 남보다 낫다 하니, 이러한 사람은 발탁하여 써서 권장되게 해야 하겠습니다."라 하여 그들을 발탁하여 교육과 학문연구 등 문풍 진작에 힘써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곧 허목은 경연관으로 발탁되었다.
         [[1675년]] [[5월]]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로 특별 승차하고 한달 뒤에는 [[의정부]][[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 경연에 입시하였다. 이때 [[송시열]]의 처리를 놓고 그는 사형을 주장하였다. [[윤휴]] 등도 사형을 주장했으나, [[허적]]은 두 선왕의 스승이고 고명대신임을 들어 사형을 반대하였다. 허목은 송시열의 사형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때 그는 서인에 의해 [[복평군]]의 추종 세력 내지는 [[복평군]]의 하수인인 것으로 몰렸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초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그해 [[5월]]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처형시킬 것을 주청하여 논란이 되었다.
         경연장에서 윤휴는 체부 설치를 극력 주장했고, [[윤휴]]의 체부 설치 주장에 대신들은 "저 사람들(彼人,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허목은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편 [[조선 숙종|숙종]]은 체찰사부 설치를 결정하고 [[의정부]][[영의정]] [[허적]]에게 도체찰사를 겸임시켰다.<ref name="chechals">[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3717146 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 중앙선데이 2009.08.09</ref> [[허적]]은 부체찰사 후보로 김석주, 윤휴, 이원정을 천거하자 [[조선 숙종|숙종]]은 김석주를 낙점했다. 도체찰사를 남인 허적이 차지했으니 [[부체찰사]]는 [[서인]] [[김석주]]에게 맡겨 견제하게 한 것인데, 부체찰사로서 체부를 북벌 총지휘부로 꾸리려던 윤휴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ref name="chechals"/> 그는 [[서인]]이 병권 문제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리라고 예견하였다. [[김석주]]가 [[부체찰사]]가 되자 허목은 [[서인]]에 대해 더욱 경계한다.
         [[1676년]]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발탁되었다. 곧 [[우의정]]으로 [[영경연]]과 [[감춘추관사]]<ref>춘추관의 종1품 벼슬</ref>를 겸하여 [[경연]]을 주관하였다. 이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7월]] 큰 한재가 발생하여 억울한 죄인들을 가려내 석방할 때 [[조선 인조|인조]]의 서녀 [[효명옹주]]<ref>[[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ref>의 석방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ref>연려실기술 제30권, 효종조 고사본말</ref>
         [[1676년]] [[1월]] 허목은 [[조선 숙종|숙종]]에게 ‘잠명(箴銘)’을 올리면서 ‘지금 신이 감히 고문체로 써서 올립니다. 이는 삼대시절의 글이고 교훈이며 법도이니 전하께서 언제나 살펴 잊지 마시고 준수하소서’라 하였다.<ref name="seo014"/> [[1678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미수와 한 집안인 영상 [[허적]]과 대립하게 되었다.<ref name="young200702"/> 허목은 [[송시열]]이 예를 오판한 것을 바로잡았음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고묘)을 하였으나 [[허적]]의 반대<ref name="young200702"/>로 무산되었다. 이때 [[경상남도]] [[장기현]]에 유배중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가 부각되자, 그는 온건파인 허적의 탁남에 맞서 [[윤휴]]와 함께 [[송시열]]의 처형을 주장하며 강경파인 청남을 이끌었다. [[1678년]] [[3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의정부]][[우의정]]직 사직을 청하여 윤허하였고, 바로 행[[판충추부사]](行判忠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679년]] [[3월 15일]] 강화도에서 [[투서의 역변]]이 일어나자 진상을 밝힐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4월 6일]] 상경해 [[송시열]]을 처벌하지 않는 [[의정부]][[영의정]] [[허적]]의 결정을 독단, 전횡이라며 맹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서인]]들은 그를 계속 공격하여 [[사문난적]]으로 몰고 갔다. [[1688년]](숙종 13년) 관작이 회복되었고, 다음해 [[3월]]에 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선영 건좌(乾坐)에 부인과 합장으로 장사 지냈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친히 제수(祭需)를 내리고 제문을 지어 [[승지]] [[박진규]]를 보내 제사 지내고, 또 자손들을 등용하고, 그의 문자와 저서를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조선 숙종|숙종]]의 특명으로 저서 《미수 기언》이 간행되었다. [[1692년]](숙종 18년) [[증직|증]](贈)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 추서되었다.
         허목이 무엇보다 軍屯田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는 논리의 기저에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나라의 조세 수입이 주는 것을 막고, 또 줄어든 조세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를 거두는 폐단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ref name="non99"/> 더불어 이들 둔전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수어, 총융, 어영청 등의 군영도 해체하여 모든 것은 호조와 병조에 귀속시켜 정부의 통제하에 있게 하여 불법적인 세금포탈을 제도적으로 없애려는 것이었다.<ref name="non99"/>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16회 일치
          1933년 시나리오의 강대국들이 할 수 있는 정책.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하지 못하는 대공황의 여파를 정부가 해결한다. 자금을 500 쏟아부어 산업효율을 10% 올리고 불만도를 2% 떨어뜨린다. 정치 슬라이더가 중앙 계획으로 한 칸 이동한다.
          언론이 정부에게 불리한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게 한다. 불만도가 내려가지만 사회가 한칸 독재적이 된다.
          * 발동 조건: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자금 500.
          세계 대공황으로 폭망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정부가 개입한다. 자금 500을 소모해 공업력 보너스 5%와 불만도 -5%의 효과를 본다. 정치 슬라이더가 중앙 계획으로 한 칸, 강경파로 한 칸 이동한다.
          * 발동 조건: "총선"이벤트 발생.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 발동 조건: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 발동 조건: 평화,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자금 100.
          * 발동 조건: 군수장관이 얄마르 샤흐트, 불만도 7% 미만, 국가 원수나 정부 수반 중 한명이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 측은 정부수반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 당원들에게 살해당해 사용할 수 없게 되며, 그 자리를 쿠르트 슈슈니크가 차지하게 된다. 또한 불만도가 10 증가하는 동시에 정치 슬라이더가 독재로 한 칸 이동한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부의 뜻을 국민들에게 알린다. 자금 50을 소모해 불만도를 1% 감소시킨다.
          * 일본이 괴뢰국으로 난징 국민정부를 소유
          반군들을 조지기 위한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에게 철도망의 이용권을 요구한다.
          * 지둥방공자치정부를 괴뢰국을 소유, 중국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아야 함.
          노구교 사건(aka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지둥방공자치정부를 합병하는 동시에 중화민국과 선전포고한다.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광서성 군벌, 산서성 군벌, 윈난성 군벌과의 관계도가 10-50 감소하며 일본의 국가 슬라이더가 간섭주의로 한 칸, 강경파로 두 칸 이동한다. 중화민국에게 광서성 군벌과 산서성 군벌을 합병하며 중국 공산당에 동맹을 제안하는 "통일 전선 구축" 이벤트가 발생하며, 3일 후 중화민국 군대의 약화를 불러오는 "상하이 사변" 이벤트가 발생한다.
          체임벌린이 실각하고 처칠이 총리가 된다. 정부수반으로 윈스턴 처칠이 임명되며 외무장관에는 앤서니 이든이 오른다. 민주주의 +1, 보수주의 +1, 간섭주의 +1, 강경파 +2, 불만도 -2%, 자금 +500.
          * 발동 조건: 정부 수반이 베니토 무솔리니
  • Victoria II . . . . 16회 일치
         모든 POP는 특정 상품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이 욕구를 충족해주지 못하면 해당 POP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투쟁을 벌이게 된다. 또한 상품들은 건설과 군대 훈련에도 필요하다. 건물을 건설하려면 시멘트와 여러가지 재료가 있어야한다. 군대를 훈련시키려면 소화기와 같은 재료들이 있어야한다. 요구하는 상품들이 없다면 건설과 훈련은 시작되지 않는다.
          * Prussian Constitutionalism(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정) : 입헌군주제이긴 한데 사실상 국왕이 다 해먹는 유사 민주주의. 전제 군주정 국가에서 투표를 허가하면 이게 된다. 여당을 플레이어가 바꿀 수 있지만 일정 주기마다 치뤄지는 총선에 따라서도 바뀐다. 무정부 자유주의, 공산주의, 파시스트는 여당이 될 수 없다. 자코뱅 반란으로 뒤집어지면 민주정이 된다.
          * Presidential Dictatorship(대통령 독재) : 반동주의 반란으로 뒤집어진 국가들은 이 정부 체제가 된다. 여당은 무정부 자유주의 정당으로 고정되며 반란이나 전쟁으로만 정부 체제를 바꿀 수 있다.
          * Bourgeois Dictatorship(부르주아 독재) : 무정부 자유주의 반란으로 뒤집어진 국가들은 이 정부 체제가 된다. 여당은 무정부 자유주의 정당으로 고정되며 반란이나 전쟁으로만 정부 체제를 바꿀 수 있다.
          * Proletarian Dictatorship(프롤레타리아 독재) : [[소련]]과 같은 체제. 공산주의 반란으로 뒤집어진 국가들은 이 정부 체제가 된다. 여당은 공산주의 정당으로 고정되며 반란이나 전쟁으로만 정부 체제를 바꿀 수 있다.
          * Fascist Dictatorship(파시스트 독재) : 파시스트 반란으로 뒤집어진 국가들은 이 정부 체제가 된다. 여당은 파시스트 정당으로 고정되며 반란이나 전쟁으로만 정부 체제를 바꿀 수 있다.
         POP들의 투쟁성이 높아지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란의 원인은 다양하다. 특정 민족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 전쟁을 벌인 걸수도 있고, 특정 사상의 지지자들이 정권 정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걸수도 있다. [[태평천국 운동]]이나 [[붉은 셔츠단]] 처럼 이벤트로 발생하는 반란도 있다. 이념 반란의 경우에는 수도를 점령하면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이 경우 모든 외교관계가 초기화되니 주의. 당신 땅을 탐내고 있었지만 동맹국 때문에 침략하지 못하던 적국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
         관계도(Relations)는 해당 국가 정부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를 의미한다. 관계도가 높을수록 요청을 들어줄 확률이 쥐꼬리만큼 늘어난다. 만약 관계도가 음수라면 모든 요청에 "ㅗㅇㅅㅇ"라는 반응이 날아온다.
  • 탈북자 망명정부 . . . . 16회 일치
         2016년 일부 [[탈북자]] 단체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한 [[망명정부]]. 가칭 '북조선자유민주망명정부'로 알려져 있다. 2017년 초에 설립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 설립될지 여부는 미지수이다.
         탈북자 망명정부의 구상은 탈북자들이 대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1990년대 부터 이미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장엽]]을 중심으로 하여 망명정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황장엽 본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2017년 [[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탈북자 망명정부 설립운동 측이 '김정남'과 접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김정남은 망명정부 수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자신이 망명정부 수반이 되는 것 역시 3대 세습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김평일'과도 접촉했다는 설[[http://ifreenk.com/87121 (참조)]]이 나오면서, 망명정부가 김씨 일가를 '구심점'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망명정부는 한반도 통일을 추진하는 주체로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http://news.donga.com/MainTop/3/all/20161006/80664378/1#csidx6390859011994e7a8d6c822b9a35888 (참조)]]
         한명섭 대한변호사협회 통일문제연구위원회 부위원장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돼 있는 이상,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망명정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대신 망명정부활동을 묵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제기했다.[[http://news.donga.com/MainTop/3/all/20161006/80664378/1#csidx6390859011994e7a8d6c822b9a35888 (참조)]]
          * 북한은 유엔회원국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어, 망명정부는 이해와 동정은 구할 수 있어도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실질적인 외교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 대한민국의 영토조항,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국민정서로 볼 때, 북한망명정부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 구심점이 없다. 북한 주민들 다수가 인정할 만한, 정부 수반의 자격을 갖춘 인물의 부재.
  • 황교안 . . . . 15회 일치
         2015년 5월 제44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어, 2015년 6월 18일 취임하였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9465457&code=41111111&cp=nv 새 총리 후보자 황교안은…朴정부 초대 내각 멤버, 외유내강형 ‘공안통’]《국민일보》2015년 5월 21일 김현섭 기자</ref>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어 [[2017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 2015.06 ~ 2017.05 :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정부위원장
         2008년 3월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을 거쳐 2009년 1월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했고, [[2009년]] [[8월]] [[대구고검]] 검사장, [[2011년]] [[1월]]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했다가 [[2011년]] [[8월 2일]] 법관에서 퇴직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860997 차동민 서울고검장, 조근호 법무연수원장 검사 생활 마감] 노컷뉴스 2011년 08월 02일자</ref> 변호사 재직 당시 그는 국가보안법 해설서를 펴내기도 한 공안통이라는 평이 있다.<ref name="rigi">[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4066 새 정부 법무장관에 황교안, 국방부장관에 김병관]</ref>
         그 뒤 2006년 검사장급 인사에서 낙마해 당시 노무현 정부가 공안분야를 홀대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ref name="rigi"/>
         2013년 9월 4일 정부를 대표하여 국회에서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 요청 이유를 설명한 황교안 장관은 이 사건 범행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위협이라 하였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090476721 이석기 체포동의안 통과 - 황교안 “이석기는 지하혁명조직 총책” … 野도 체포동의 당론 찬성]《한국경제》2013년 9월 5일</ref> 이석기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재석의원 289명 가운데 찬성 258명, 반대 14명, 기권 11명, 무효 6명 등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고, 수원지방법원에서는 같은 달 5일 이석기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였으며 검찰은 같은 달 26일 이석기 등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기소한 후 2014년 2월 3일 결심 공판에서 징역 20년을 구형하였다.<ref>[http://www.ytn.co.kr/_ln/0101_201402031418170083 '압수수색부터 1심 판결까지]《YTN》2014년 2월 3일</ref> 2014년 2월 17일 수원지법은 내란음모, 선동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이석기에 대하여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4490.html 이석기 내란 음모 혐의 인정돼…징역 12년]《한겨레》2014년 2월 17일 이정애 기자</ref> 이에 검찰과 피고인측은 모두 항소를 하였고 2014년 8월 11일 서울고법 재판부는 내란선동에 대하여는 유죄를 인정하였으나 내란음모는 무죄로 판단하고 이석기에 대하여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11/2014081101979.html RO 내란음모 항소심 재판부, 이석기 의원 징역 9년 선고…'내란 선동' 인정, '내란음모' 무죄]《조선일보》2014년 8월 11일 이정원 기자</ref> 역시 양측이 모두 상고하여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었는데, 2015년 1월 22일 대법원은 내란선동은 인정되나 내란음모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다수 의견에 따라 상고를 기각하였고, 이석기에 대해 징역 9년을 선고한 원심은 확정되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3/2015012300328.html [이석기 확정 판결] 130명 회합 목적은 폭동… RO, 의심은 들지만 내란음모는 無罪]《조선일보》2015년 1월 23일 양은경 기자</ref>
         이석기 사건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진행된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違憲)정당해산심판’ 청구에서도 황교안 장관은 정부대리인으로서 직접 변론기일에 출석하여 “통합진보당의 최고 이념인 진보적 민주주의와 강령의 구체적 내용은 현 정권을 타도하고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으로 북한식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40129/60468708/1 '통진당 해산심판 첫 변론“대한민국 파괴"vs"민주주의 후퇴“ 장관 - 당 대표 맞붙다]《동아일보》2014년 1월 29일 최예나 기자</ref> 황교안 장관은 2014년 11월 25일에 있었던 최종변론에도 직접 출석하여 "통진당의 강령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며 "이들이 실제로 추구하고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용공 정부 수립과 연방제 통일을 통한 '북한식 공산주의'를 실현하는것"이라며 정당해산을 거듭 촉구했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526421&cloc=olink|article|default 황교안 “작은 개미굴이 둑 전체 무너뜨린다]《중앙일보》2014년 11월 26일 박민제·이유정 기자</ref><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523857&cloc=olink|article|default 통진당 해산심판 최종변론 - 황교안 법무부장관]《중앙일보》2014년 11월 26일 심서현 기자</ref>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재판관 9명 중 8명 인용 의견으로 통진당 해산결정을 하였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121901070121079001 통진당, 북한식 공산주의 추종”…‘헌정 초유’ 해산 선고. 헌재, 8대1로…소속 5명 모두 의원직 박탈]《문화일보》2014년 12월 19일 김병채·김동하 기자</ref>
         청와대는 대한민국 44대 국무총리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내정하였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009465457&code=41111111&cp=nv 새 총리 후보자 황교안은…朴정부 초대 내각 멤버, 외유내강형 ‘공안통’]《국민일보》2015년 5월 21일 김현섭 기자</ref>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된 [[2016년]] [[12월 9일]]부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10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2018년 8월, 자신의 수필집인 <황교안의 답>을 출판했다. 부제는 '황교안, 청년을 만나다'이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8211628001|제목=황교안에게 ‘참된 보수’란···수필집 ‘황교안의 답’ 출간|성=|이름=|날짜=2018-08-21|뉴스=|출판사=}}</ref> 9월에는 서울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는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박근혜 정부 당시 관료들 여러 명이 참석하였다. 황 전 총리는 [[박근혜 정부]]에 대해 "개혁지향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며 "민생 지향과 경제 살리기에 역점을 두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정부의 모든 노력이 소위 ‘적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쓸려가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도 말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861204.html|제목=황교안 ‘보수 지지 1위’라는 질문에 “많은 의견 듣고 있다”|날짜=2018-09-07}}</ref>
         법무부가 황교안 총리후보자 청문회 지원을 위해 정수봉 부산지검 동부지청 형사1부장과 권순정 의정부지검 형사5부장 등 현역 부장검사 두 명을 포함한 지원팀을 꾸려 국무총리실 청문회 지원단에 파견하기로 해 논란이 일었다.<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21192 현역 부장검사 2명, 황교안 인사청문회 지원 논란]《뷰스앤뉴스》2015년 5월 24일 최병성 기자</ref>
         [[분류:195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창원 황씨]][[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분류: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광성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침례신학대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
  • 흥친왕 . . . . 15회 일치
         1866년 도승지, [[1867년]]에는 직제학이 됐다가 그해 3월 가선대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하였고, 바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동지경연사, 종정경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당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73년]] 종정경(宗正卿)이 되었으나 [[1874년]] [[11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의해 섭정직에서 강제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유유하고 고분고분한 성격 덕에 계속 관직에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생이 국왕이었고 아버지는 섭정인데도 자신에게는 낮은 직위가 부여되었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척족에게 아부한 것 역시 관직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1878년]](고종 16년)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종정부, 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879년]] [[형조]][[판서]](刑曹判書),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시강원 좌빈객, 별입직(別入直)을 거쳐 종1품으로 특서되었다. 그해 숭정대부에 승진하여 행 병조판서가 되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80년]] [[병조]]판서, 1881년 [[1월]] 금위대장,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이어 1월 말 판돈녕부사로 통리기무아문당상,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 임오군란과 보정부 왕래 ====
         [[1882년]] 7월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어 [[청나라]]에 호송,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감금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다. 그는 대원군의 [[텐진]] 납치기간 중 아버지와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다.
         텐진의 보정부에 감금된 뒤에도 몰래 비밀리에 편지를 써서 인편을 통해 고국으로 부쳤다.
         {{인용문|다시 뵈옵도 못하고 세상이 올이지 않이하리신이 지필을 다해야 한심하오니다. 태평히지니시옵기 니니 발아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br />(다시 뵙도 못하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종이와 붓을 마주 대하기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br /><br />1884년 음력 10월 12일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ref name="문사1"/>}}
         {{인용문|신문지의 경평이([[이세보|경평군]])는 내 편이고, 영익이([[민영익]])는 딴 편으로 말하고, 영익이가 머리 깎았다 하면서 일번 기별하여 원수를 갚는다 하였으니 우습다. 사신<ref>청나라로 오는 진주사</ref> 을 또 보내어야 되지, 안보내면 상감이 불효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니 부디 주선하되 (올수 있으면) 너더러 들어가라<br /><br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ref name="문사1"/>}}
         {{인용문|나가고 안이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 쳬면이 쳔하의 빗치 나기시니 부디 잘 알외어니 일신을 살려다고....<br />(나 되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의 체면이 천하에 빛이 나겠으니, 부디 잘 아뢰어 내 한몸을 살려다오)<br /><br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ref name="문사1"/>}}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3642b daum 사전]</ref> 대원군은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조선 고종|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ref name="daum1"/>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에 의해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개화파]]와도 인간 관계를 형성했던 그는 정변 내각의 [[의정부]][[좌찬성]](左贊成) 겸 좌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진압되었고, 그도 좌찬성 겸 좌우참찬에서 해임되었다. 판종정경의 직위를 받았으나 [[갑신정변]] 당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민씨 일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정변 관련자들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불문율에 붙여진다. 그 후 흥친왕은 7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 며느리: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 교관(敎官) 김병일(金炳日)의 딸.
         [[분류:유교 신자|이희]][[분류:과거 급제자|이희]][[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대한제국의 부장]][[분류:대한제국의 친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육군 장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귀족]][[분류:테러 피해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운현궁]][[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영선군|영선군]][[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서성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19세기 한국의 군주]]
  • 권벌 . . . . 14회 일치
         [[1540년]]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 [[1541년]] [[예조판서]], [[의정부]][[좌참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겸하다 [[1546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됐다. 이때 소윤 일파가 대윤을 공격하면서 [[유관]], [[유인숙]] 등을 같이 공격하자 이들을 변호하였다. [[을사사화]] 직후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군됐다가 [[정순붕]], [[이기]] 등의 반대로 삭훈됐다.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 유배되었는데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태천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삭주]]로 이배(移配)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조정 내직으로 근무할 동안에는 예겸 임명과 상관없이 항상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참찬관 등에 겸임되어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 (自警篇), 근사록 (近思錄) 등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1567년]](명종 22) 신원(伸寃)되었고, 선조 즉위 후 직첩을 돌려받고 [[1568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고 후에 현종때 사액이 내려졌다.
         [[공신]] 책록 경력으로는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炳幾定難衛社功臣) 2등과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이다. [[종계변무]]가 성공하자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에 힘쓴 공로로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不遷位)에 선정되었다.
         [[1478년]](성종 9) [[11월 6일]] 충재 권벌은 [[경상북도]] [[안동군]] [[북후면]] 도촌리(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도계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등이다. 복야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선략장군과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생원]] [[증직|증]] [[의정부]][[좌찬성]]과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주부(主簿)를 지낸 윤당(尹塘)의 딸이다. 할아버지 권곤은 생전 관직이 선략장군 부호군이었지만 여러차례 추증되어 증 [[이조]][[참판]]과 [[증직|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됐고, 아버지 권사빈은 [[성균관]] [[생원]]이었지만 여러번 거듭 추증되어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1512년]] [[11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건의하였다. 이후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성(司成)을 거쳐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사건으로 인해 해직되었다가 그 뒤 얼마 안 되어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 외직으로 [[영천]][[군수]]로 발령되었다. [[1517년]](중종 12년) [[사헌부]]장령, 그해 [[10월]]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1518년 가을 좌승지로 재직 중 [[조선 중종|중종]]이 유생(儒生)을 불러 친강(親講)할 때 그는 [[조선 단종|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주고 제사지내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1540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자 그는 여러번 체직을 청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곧 [[한성부 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예조판서와 좌참찬 재직 때는 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가정제]]의 엽기행각에 궁비인 양금영(楊金英) 등이 가정제를 시해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이때 [[조선 중종|중종]]이 봉변을 당한 [[가정제]]를 위로하겠다고 진위사(陳慰使)를 파견하려 하자, 그는 경연(經筵)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오히려 중종에게 "천자가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으로 깊은 구중 궁궐에 있는데도 뜻밖의 음모가 측근의 시어(侍御)에서 나왔으니, 잠시도 경계하지 않으면 위험한 화가 따릅니다. 원컨대 이를 거울로 삼아 항상 성찰을 더하시면 좋겠습니다."고 하며 오히려 중종에게 타산지석 삼아서 항상 성찰하고 깨닭으라고 권고했다. [[정경세]]에 의하면 그 말이 매우 기휘(忌諱)를 범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두려워해서 고개를 움츠렸을 정도였다 한다.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중종이 죽자 그해 [[11월]] [[빈전도감]](殯殿都監)에 참여하였다. [[1545년]](인종 2)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으며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인종]]이 후사 없이 병으로 갑자기 죽자,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하여 [[7월]]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윤인경]] 등이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할 적에 '[[이언적]]과 권벌 등이 [[문정왕후|대왕 대비]]([[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일을 막으려 한다.'는 말을 몰래 퍼뜨려 그를 모함하였다.
         [[1567년]](명종 22년) 신원(伸寃) 복권되었고,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후 그해 [[10월]] [[조선 선조|선조]]의 명으로 직첩을 되돌려받았다. 이후 [[기대승]]은 '당시 학문했던 사람으로 [[이언적]]이나 권벌 같은 이들이 어찌 추호인들 윤임에게 붙을 리가 있겠느냐'며 억울함을 상주하였다. 그가 복권되자 미암 [[유희춘]](柳希春)은 교지를 읽다가 권벌과 [[이언적]]의 누명을 씻어 주시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한다.[[조선 선조|선조]]는 그를 가리켜 급제 권벌은 덕행이 갖추어졌고 충성 또한 지극했다(故及第權橃, 德行純備忠誠俱至)고 평하였으며, [[1568년]](선조 1년) [[2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1571년]] [[9월]] 충정(忠定)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사군진절왈충 순행불상왈정(事君盡節曰忠 純行不爽曰定)이라 하여 충정으로 정해진 것이다.
         [[1588년]](선조 21년) [[경북]]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조선 현종|현종]] 때 가서 사액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었다.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다.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 재직 시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중종 4(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이들 일기는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자료로서 채용되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다.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 정인숙 (1945년) . . . . 14회 일치
         모델, 배우 지망생이었으나 고급 요정의 종업원이 되어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당시의 정계 거물들을 상대했던 그녀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정일권]]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이것이 불문에 붙여졌다. 이는 당시 유행가인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으로 개조되어 확산되었다.<ref>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ref> 아들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느니, 정 전 총리라느니,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라느니 하는 소문들도 무성<ref name="ilyo01">[http://www.ily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889 <nowiki>[</nowiki>미스터리 추적<nowiki>]</nowiki> 정인숙과 그아들, 진실은 이것] 일요신문 2007년 04월 08일자</ref> 하기도 했다.
         고급 요정에 종사하며 큰 돈을 거머쥐면서 씀씀이도 늘어났는데, 선운각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대한민국 정치계 인물인 모 씨다. 모씨와 계속 만나다가 그를 통해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도 만나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는 저명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다. 그 뒤 또다른 정부 고위 인사 모씨를 만났고, 그와는 관계는 석 달 남짓 계속된다. 그러다가 당시 그녀의 미모를 접한 정부의 각료 모 씨가 정부인사 모 씨와 한달간 그녀를 서로 차지하려고 갈등하였고, 그 뒤 정인숙은 선운각을 그만두고 비밀요정으로 옮긴다.
         미스 코리아나 영화배우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요정에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선운각, 옥류장 등 서울의 일류 요정들은 정인숙을 데려가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ref name="han01"/> [[선운각]] 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고위층 인사와 교분을 쌓았다. 이때부터 정인숙은 저명인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인숙은 비밀요정을 주 무대로 정부의 A급 고관대작들만 상대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주위에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며 자신이 정치권 고위인사와 ‘깊은 관계’라고 털어놓기도 했다.<ref name="ilsa01"/> 이같은 그의 명성 때문에 ‘정인숙 피살 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 ‘섹스 스캔들’로 비화됐다.<ref name="ilsa01"/>
         1주일 후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빠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말을 믿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폭언을 가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암살하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다.<ref>1970년 3월~: 여영무, 〈추적 정인숙 미스테리〉《신동아》(1983.9.) 166~167쪽</ref>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였다.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의혹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자를 색출하였으나, 정일권 총리의 해임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올라갔다. 겉으로는 범인을 잡아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국회에까지 이르렀다. [[1970년]] [[5월]] 열린 임시국회는 정인숙 사건과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정부 발언을 통해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ref name="kim99">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99페이지</ref> 그 첫 출발은 [[법무장관]]이던 [[이호]]가 정인숙 사건을 자진해서 보고한 국정보고에서 시작되었다.<ref name="kim99"/>
         그러나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는 5월 13일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에 대한 정부의 민감한 대처방식을 통렬하게 비<ref name="kim99"/> 꼬았다.
         대사(大蛇), 큰 뱀으로 불렸던 유진산은 권모술수와 밀실정치에 뛰어났다. 당시 [[김계원]]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은 유진산과 일부 야당 인사들에게 접근해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진산은 이를 쟁점화했고 뒤이어 다른 야당인사들도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시켰다.<ref>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 196~197</ref>
         유진산 당수를 시작으로 [[조윤형]], [[김상현]] 등의 야당 의원들은 정인숙 사건과 관련된 소문을 전달하고 그 의혹을 추궁했다. 조윤형 의원은 [[5월 15일]] 정일권과 정인숙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본회의장에서 공개했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수사에서 불거진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ref name="kim10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0페이지</ref> 조 의원은 이어 경찰이 정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경찰은 오빠 정씨가 정 여인 재산을 노리고 열등감에서 살해했다고 하지만 재산 자체가 정 여인 명의로 돼 있어 상속할 수<ref name="kim100"/> 도 없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김상현의 발언은 즉각 본회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차지철]] 의원을 필두로 고함과 욕설이 튀어나왔고, 이에 맞서 신민당 의원들도 고함을 지르며 공화당 의원들과 맞섰다. 한 여인의 의문에 찬 죽음은 국회 본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들의 호기심만 부채질했을 뿐이었다.<ref name="kim101"/> 야당에서는 그의 암살 사건을 정치 공세로 활용하려 했고, 정부와 공화당은 이를 수습하려 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귀국 후, [[1991년]] 초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추진했다가 갑자기 소송을 취소하였다. 정성일의 생부에 대한 논란은 [[정일권]] 설과 [[박정희]] 설, [[박종규]] 설, [[이후락]] 설<ref name="ilyo01"/>, 기타 정부 각료 설 등이 유력하였다. 그러나 정인숙의 유족들은 처음에 [[정성일]]을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정일권의 친자라고 주장하였다.
  • 추경호 . . . . 14회 일치
         |경력 = 제6대 [[대한민국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금융위원회 부위원장]]<br/>제4대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br/>제2대 [[대한민국의 국무조정실장|국무조정실장]]
         2013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 7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됐다.
         * 2013년 3월 ~ 2014년 7월: [[기획재정부]] 제1차관
         * "선택과 집중으로 녹색산업에 대한 금융지원의 효과성을 제고해야 한다. 녹색금융의 저변이 확대됐음에도 성장성에 대한 시장의 확신 부족에 따라 민간참여가 아직까지 소극적이다. 정부와 민간의 적절한 역할배분이 중요하다.“(2012/09/21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12 글로벌 그린성장 포럼’에서)
         * "규제기요틴은 경제혁신을 가로막거나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규제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강도 높은 규제개혁 방식이다. 이번 건의과제들에 대해 정부는 규제기요틴 이름에 맞게 그 어느 때보다도 속도감있게 전향적인 자세로 과제들을 검토했다." (2014/12/28 규제기요틴 민관합동 회의에서)
         * "각 기관에서 공공, 민생, 경제·금융 분야 등 3대 분야에서 우선 추진할 과제를 선정하고,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실천방안을 마련해달라. 부정부패는 단호하게 척결해가되 비리의 환부만을 정확히 찾아 제거함으로써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유념해달라. "(2015/03/20 서울청사에서 추 실장의 주재로 열린 부정부채 척결 관계 차관회의에서)
         * “높은 기술력과 뛰어난 아이디어로 무장한 중견기업은 우리 경제의 든든한 허리이자 희망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견기업의 성장이 필수적인 만큼 정부에서도 중견기업의 성장 걸림돌을 제거하고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커 나갈수 있도록 불합리한 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겠다.” (2015/04/20 한국중견기업연합회와 규제개혁간담회를 열고)
         2005년 은행제도과장으로 재직할 때 재정부 직원들이 뽑은 ‘가장 닮고 싶은 상사’에 선정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Who Is ?]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 실물경제와 금융 모두 정통한 경제관료|url=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37|날짜=2015-04-07|뉴스=비즈니스포스트}}</ref>
         |직책 =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
  • 허정숙 . . . . 14회 일치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38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부|보건상]], [[1959년]] [[법무부|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에 복귀,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재판소|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7,8기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 재선되었다.
         [[1936년]] [[최창익]]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석방되어 망명한 [[한빈]](韓斌) 등을 만났다. 이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난징]]으로 가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조선의용대]]에도 가담했으며, [[조선청년 전위동맹]]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최창익]], [[박효삼]], [[한빈]]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려는 [[김원봉]] 등의 견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북한에 정착한 [[1946년]] [[5월]]부터 허정숙은 38선 이북 각지를 찾아다니며 인재를 영입하여 정권에 참여시키려 노력하였다. 평양교원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동시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박봉조]] 역시 허정숙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었다.<ref name="chyangs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01/2011040101287.html <nowiki>[</nowiki>Why<nowiki>]</nowiki><nowiki>[</nowiki>문갑식의 하드보일드<nowiki>]</nowiki> 박준영 을지대 총장이 말하는 '을지 3代'] 조선일보 2011년 04월 02일자</ref> 박봉조를 찾아간 허정숙은 참여해줄 것을 요청한다. "박 교수, 학생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이 더 중요한 과업 아니오?<ref name="chyangss"/>" 박봉조가 거절하자 허정숙의 눈빛이 벌겋게 변했다. 말투도 거칠어졌다 한다.<ref name="chyangss"/> 박봉조는 허정숙 등의 거듭된 부탁에 못이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외무성 관리가 되었다가<ref name="chyangss"/>, 월남한다.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취직을 적극 주선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사람됨됨이나 능력을 보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
         [[김일성]]은 [[1947년]]과 애국가 제정 직후와 마찬가지로 시기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좀더 기다려 볼 것을 권유했다. [[김일성]]은 허정숙의 건의에 대해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앞두고 [[애국가]]를 보급했으면 하는 동무의 심정은 안다"며 "그러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들의 구성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를 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f name="yuk49"/> 당시 상황에서 [[애국가]]를 내놓는다는 것은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남한 정치인들에게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을 주장해 온 북한의 주장에 의혹을 품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ref name="yuk49"/>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통합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자 통합된 조선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총선거가 결정되자, 허정숙은 당시 여성들이 학력이 낮았으므로 투표에 불참할 것을 염려하여, 여성들의 민주적 선거 참여를 호소, 독려하였다.
         ===== 북조선 정부 수립 =====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내각 [[문화선전성|문화선전성상]]에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9110032920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9-11&officeId=00032&pageNo=1&printNo=601&publishType=00020 |제목 =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 = 1948-09-11 |쪽 = 1 |인용문 = <!--【公立通信】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에 관하여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구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를 다음과 같은 성원으로서 구성함을 결정한다. ... 허정숙 노동상 ...-->}}</ref> 허정숙이 문화선전상으로 전직되자 [[이상조]]가 중앙당 간부부장직을 인수인계하였다.<ref>김호웅,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 222페이지</ref> 문화선전상과 동시에 보건성 부상을 겸직하였다.<ref>"「金正日 백두산 出生」은 거짓말", 동아일보 1991.12.26일자 15면, 정치면</ref>
         {{인용문2|조선여성은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가혹한 역사를 가진 인간일 것이다. 구미 각국의 여성은... 문명의 혜택과... 교육이 고등한 까닭으로...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여성은 고루한 관습과 제도의 영향으로 전무교육상태에 있고... 현재 조선여성의 대다수가 무교육자인 가정부인이며... 대부분이 경제상으로 무산계급에 속한 여성이다... 조선여성에게는 개성의 자유나 인격의 대등은 아직 발생되지 아니하였다.<ref name="pyung01"/>}}
         허정숙은 강연과 칼럼, 연설을 통해 '결혼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야 된다. 그리고 쉽게 이혼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결혼]]을 강요하고 가정, 가족이 정답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여러 강연에서 허정숙은 조선 정부나 일제 정부가 가정과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국민들을 노예화, 세뇌화 시켜서 저항하기 힘들게 만들려는 고도의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허정숙은 가정, 가족 이전에 여기에 내가 있다,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13회 일치
         각 국가의 장관진을 차지하는 인물들은 각자 하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당 특성은 여러가지 요소에 보너스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패널티를 주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내각진 중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제외한 8명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지만, 민간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2%, 군사 분야 장관은 불만도가 1% 올라간다.
          >인기있는 허수아비는 정부 체계 상으로는 작은 힘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기 때문에 그는 어떤 권력자라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 되었다.
          >체념한 총통은 무정부주의와 대중 의견이 나라를 무너뜨리는걸 막기 위해 권력을 잡았다. 정치적 언쟁에 질린 이 인물은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던 것처럼 국가를 운영하려 하고있다. 여전히 그는 능숙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다.
         == Head of Government(정부수반) ==
          >밀실 모략가는 몇년간 원내 총무로 일해온 베테랑 정치인이자 당의 중역이다. 어떤 모의도 그를 몰아낼 수 없으며, 어떤 외국 정부도 그를 실각시킬 수 없다. 외국 정부는 이 인물을 상대할 때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운좋은 아마추어는 지금의 자리를 오로지 운 덕택에 얻었으며 정치나 정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집무실을 충격에 몰아넣는 일이 있어도, 그의 변함없는 미소는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엄청 무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케인즈 경제학은 민간 분야의 선택이 비효율적인 거시경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이나 정부의 재정정책과 같은 공공 정책을 시행해 경기 순환의 생산량을 안정화 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자는 시장 경제의 전문가다. 그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한다고 확고히 주장하고 있다. 전시던 평시던, 옛날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 자원을 제일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혼합경제는 정부와 민간분야 둘 다 경제를 관리하는 경제 체제로,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둘 다 지지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다수의 혼합경제는 강한 규제력을 지닌 감시가 동반된 시장 경제로 묘사되며, 여기에 정부가 다양한 분야를 지원하는 점이 추가된다.
          >계획경제는 (보통 정부에 의한) 중앙 관제가 만들어낸 계획에 따라 생산과 투자를 결정하는 경제 체제이다.
          >의료와 치안 지지자는 정부의 주 목적이 노동자의 안전과 의료 시스템 확충이라고 생각한다.
  • 김상조 . . . . 13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4012D><-5><bgcolor=#FFFFFF><:>{{{+1 [[대한민국 정부|[[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글자없음).png|width=30]]]] [[대한민국|{{{#043762 '''대한민국'''}}}]] [[공정거래위원회|{{{#043762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043762 '''위원장'''}}}]]}}}||
         ||<#C01920><-2><:> [[박근혜정부|{{{#FFFFFF ''' 박근혜정부 (2013 ~ 2017) ''' }}}]] ||<#1870B9><-3><:> [[문재인 정부|{{{#FFFFFF ''' 문재인 정부 (2017 ~ 2022) ''' }}}]] ||
         한국의 경제학자이자 [[문재인 정부]] 초대 공정거래위원장이다. 한국내 대표적인 좌파 경제학자로 꼽으며,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비판해 "삼성 저격수", "삼성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문캠|문재인 캠프]]에 합류하였다. 결국, [[문재인 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회|공정거래위원장]]에 내정되었다.
         6월 12일 결국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었지만, 청와대에서 임명을 진행하여 문재인 정부 첫 공정거래위원장이 된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피링에서 길어진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며, 각종 여론조사 등을 통해 이미 국민의 청문회를 통과했다는 발언을 하며, 공정거래의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원래부터 찬성 입장이었던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인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모두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7/06/20170613327266.html|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자유한국당은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에 맞서 투쟁해나가겠다"며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바른정당은 "오만한 문 대통령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라 비판하였다. 국민의당은 당초 김상조 후보자의 임명 자체에는 반대가 없었던 터라, "국회 청문회 보고서 통과없이 임명되는 것에는 유감스럽지만, 이는 여당의 고집과 야당의 아집이 빗어낸 것이다"며 공동책임론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9334195&date=20170613&type=1&rankingSectionId=100&rankingSeq=9|대체적으로 야당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3741|문 대통령의 연설 중 조는 모습]]이나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18&aid=0003847763&date=20170612&type=1&rankingSectionId=100&rankingSeq=24|원내대표 회담에 불참]]하는 등 애초에 협치를 바라지 않는 듯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보이면서 애초에 협치를 바란 것이 맞느냐는 지적이 많다.
         6월 20일에 있었던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해 "지난주 검찰이 공정위 역사상 유례없는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검찰을 신뢰하지만 직원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불안감을 극복하고 새 정부가 공정위에 요구하는 소임을 수행해 낼 수 있을지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막막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http://v.media.daum.net/v/20180625203721773?rcmd=rn|*]]
         국무총리 청문회에 이은, 사실상 2번째로 청문회를 겪은 인물이기 때문에 야당의 집중공세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마치 김상조가 '논란이 무척 많은' 자질이 의심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상조 임명을 강행하고 이뤄진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83%를 기록했을 정도로 국민여론은 오히려 김상조 임명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2000년 8월, 과거 자신이 연구자로 참여하였던 정부 용역 보고서를 그대로 베껴 논문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21627448#homec|관련기사]] 표절이라 하면 남의 것을 베끼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것을 베껴도 표절이다. 그리고 상당 부분 페이지가 그대로 옮겨졌다면, 현재 내용상으로는 표절로 볼 수 있는 것이 맞는다.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 [[분류:경제학자]] [[분류:교수]] [[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1962년 출생]]
  •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 . . . . 13회 일치
         [[6.25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 측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민국의 망명정부를 일본에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야마구치 현]][* 혼슈의 서쪽 끝, 큐슈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에 설치하도록 추진했던 계획. 이 제안에 관한 기초적인 기록은 전 야마구치 현 지사,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 뒤, 1950년 6월 27일 오전 2시, 이승만은 [[대전]]으로 피신했다. 2시간 뒤인 오전 4시에 이승만은 [[수원]]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이후 6월 28일 서울이 완전히 함락된다.
         이승만의 제안은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이 제안을 전달받은 일본 정부는 당시 야마구치 현 지사 다나카 다쓰오에게 임시정부를 수용할 6만명 규모의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하여 특별 식량배급 요청 여부를 검토하였다. 당시 다나카 지사의 비서 역시 관련 증언을 하였다.
          * 아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으로 망명한다는 계획이 나올 정도로, 이승만 정부가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당시 일본은 [[GHQ]]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망명을 시도했다면 망명정부 설치 지시는 이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수십만명 정도 규모의 망명정부는 결국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백제 시즌 2--
          * 비슷한 것으로 [[대한민국 망명정부 서사모아 설치계획]] 이 있다.
  • 유승민(정치인) . . . . 13회 일치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박근혜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청와대]]와 여러 차례 충돌을 벌이다가, 2015년 7월 원내대표 당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갈등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5년 4월에 있었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로 대표되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이후였다. 그 연설 이후, [[박근혜]]로부터 이른바 '찍박'으로 낙인찍혀 결국 원내대표직 사퇴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같은 인기(?)는 유승민의 언론 독립성에 대한 소신 덕택일 가능성도 높다. 유승민은 KDI연구원 시절부터 공기업 독점에 의한 광고업의 폐혜 등 언론의 독립성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해왔고, 특히 재벌 대기업의 언론사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그리하여 2009년 속칭 '미디어법 개정 파동' 사태 당시 한나라당의 찬성이라는 당론을 깨고 반대하였으며, 2012년 [[이명박 정부]]와 MBC의 갈등으로 촉발된 언론노조 파업 당시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현재 MBC와 KBS의 사장선임방식 등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해당 파업을 지지하였다.
         당시 파업 중인 노조대표들과 면담하는 유승민. 심지어 당시는 2012년 총선 직전이였다. 당시 여당이였던 [[한나라당]]의 심장과도 같은 [[대구광역시]]에서 출마하는 한나라당 후보자가 당시 정부에 반대되는 소신을 지킨 것.
         국방위원장을 지낸 후 국회 운영위원장으로 옮기기 전 잠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청와대 얼라들' 발언으로 외교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을 질타하였다. 또한 "'왜 사드를 배치하는데 [[중국]]이 난리냐"'며 사드의 국내도입에대해 강경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한미 전작권 재협상을 대선공약 파기라고 인정하며 "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박]] 세력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약 9개월 남짓한 외교통일위원회 활동이였지만 유승민 의원은 NGO 국감모니터단 선정 우수국감의원, 그리고 경실련에서 선정한 외통위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 그 유명한 '''[[문재인]] vs 유승민''' 사건. --공군참모총장의 벙찐 표정이 포인트-- 여기 나오는 [[정경두|공군참모총장]]은 지금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다. ||
         반면 [[대한민국 공군|공군]]력 건설, 특히 [[KFX]]나 [[L-SAM]]을 비롯한 국산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KFX 관련 주요 기술의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된 상황에서도 정부가 자체 개발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방사청과 청와대 참모진이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며 여권 소속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KFX F-35 도입으로 전환, THAAD, [[미국]] 주도 MD 참여 등에 호의적인 견해도 나타냈다. 때문에 국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력 강화를 선호하는 이상주의적 [[밀덕]] 사이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산 무기의 여러 결함 때문에 검증된 미국산 무기를 선호하는 현실주의적 [[밀덕]]들에게는 오히려 호평을 받고 있다.[* KFX의 경우, 실패하면 그대로 [[대한민국 공군]] 미래전력을 다 말아먹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차라리 개발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 접고 검증된 미국제 전투기 도입을 찬성하는 주장이 [[밀덕]]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많다.]
         대선토론부터 시작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도, 유승민 후보는 일관되게 사드배치 조기완료와 추가도입을 주장했고, 전략성 모호성이라는 개념과 국회비준 운운하는 문재인정부를 '''사드배치를 왜그리 머뭇거리냐''' '''운동권식 사고로는 국정 망친다''' 고 거세게 비난하였다. 그 이후 북한의 잇다른 ICBM도발과 6차 핵실험이 발생하자 결국 9월 7일 사드배치를 완료하였다. 또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에서도, 유승민 의원은 '잡음이 있긴 했지만 그 자체는 찬성' 의 입장이였다. 2016년 당시 야당이였던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을 배신한 밀약''' 이라고 거세게 비난하였고, 당시 문재인 전 대표도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으나, 2017년 8월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연장되었다.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을 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중략) [[유승민|여당의 원내 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입니다. 정치는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5년 2월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 2개월 만의 15년 4월 첫 원내대표 연설에서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력이 있고, 동시에 양극화 문제 해결, 공동체 붕괴를 막기 위해 중부담-중복지 체제를 확립해야 하며, 그를 위해 보편적인 조세 형평성 3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부자와 대기업은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금을 떳떳하게 더 내고 더 존경받는 선진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세 형평성이 확보되어야만 중산층에 대한 증세도 논의가 가능해질 것입니다."(해당 연설 내용 中)]
         >'''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으로 말미암아서 새누리당 원내대표시절 유승민은 박근혜 정부와 정면 충돌하게 되고 그의 정치적 험로를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2017년 1월 2일, [[JTBC]]에서 [[이재명(1964)|이재명]] 성남시장, [[전원책]] 변호사, [[유시민]] 작가와의 뉴스룸 진행 후 100분 토론에 참여했다. 이 토론에서 유승민은 재차 [[박근혜 정부]]의 잘못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고, 본인의 복지 노선과 개혁보수신당의 향후 진행방향에 대해 밝혔다. --전원책의 맹공을 뚫고 본인의 소신을 밝혔다.--
  • 정승화(육군) . . . . 13회 일치
         [[5.16 쿠데타]] 때는 방첩대장(현재의 명칭은 [[국군기무사령부|국군기무사령관]])을 역임했다.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의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 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이 때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들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이 사건을 덮기로 하였다. 김재춘은 5.16쿠데타에 가담해서 한때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랐으나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 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정권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문서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라." 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가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그것이 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의 [[김영삼]]-[[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거기다가 재야 진보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등 두명이 하나로 단일화됬어도 노태우가 대선에 당선될일은 없었을것이라고 한다.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무혈입성)이 유력하였다. 정승화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전격 등장했다.
         공식선거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바로 전날 [[김현희(1961)|김현희]]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었고, 3김이 서로 먼저 대통령 해보겠다고 동시출마하는 병크까지 터뜨려,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36%, 김영삼-27%, 김대중-26%, 김종필-7%[* 보면 알 수 있듯, 3김이 단일화만 했어도 노태우는 절대 당선될 수 없었다.], 즉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강등 조치된 장교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본 헌병감), 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좆논리|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외려 군사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이 87년에 제정된 헌법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전두환]]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가 [[특별사면]] 혜택을 받아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 한명회 . . . . 13회 일치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 (1426년)|한명진]]의 후손이었다.
         압구정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음력 10월 25일]] [[한성부]]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에 [[증직]]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와 이초참판 겸 [[예문관]] 직제학 [[이척]](李逖)의 딸인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모친 여주이씨 부인이 수태된 지 7개월만에 태어났다 하여 칠삭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뒤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의금부]][[도사]]를 거쳐, [[조선 세조|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면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발탁되었다가 [[1454년]](단종 2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한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임명되고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63년]](세조 9년)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충훈부]]당상을 겸임하였다. [[1464년]](세조 10년)에 [[평안북도]]의 변방에 성곽을 개보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의주]]의 하류에는 진보(鎭堡)가 설치된 곳이 없으니 만일 [[여진족]]의 침입이라도 있게 되면 외딴 성(城)은 후원(後援)이 없고, 희천(熙川)과 영흥(永興) 사이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만에 하나 불의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사세가 멀리서 구원하기는 어렵겠으니, 의주 하류에는 새로이 진(후일의 인산진(麟山鎭))을 설치하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새 군(훗날의 영원군(寧遠郡))을 두는 것이 이로울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하여 [[인산진]]과 [[영원군]]을 신설하였다. 바로 [[평안도]]의 성곽 개보수 공사에 파견되어 직접 이를 감독, 관장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남이]](南怡)가 쓴 시구가 문제가 되어 [[남이의 옥|모역사건]]으로 몰리자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신숙주]], [[유자광]] 등과 함께 [[남이]], [[강순]] 등의 사형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이]] 등이 처형된 후 [[유자광]], [[신숙주]] 등과 [[남이]], [[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기難翊載功臣) 1등관의 호를 받고는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1474년]](성종 5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475년]] 초 사은사(謝恩使)로 연경(燕京)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선 성종|성종]]이 다시 군신회의를 소집하자 재상들은 모두 추위와 어려움을 이유로 파병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한명회는 그래도 파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논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녕만 도모하기 때문이고, 노신(老臣)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大體)입니다. 군왕의 적개(敵愾)에도 의당 급히 서둘러야지 늦출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라며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논의가 계속되다가 그의 듯이 관철되어 [[조선 성종|성종]]은 [[의정부]][[좌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여 다시 군사를 파병,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성종은 '경의 강한 계책 덕에 거병하여 성공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며 그를 칭찬하였다.
         또한 그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장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조종조(祖宗朝)에 압록강 연안에 위아래로 장성(長城)을 쌓으려고 하다가 일이 커서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다시 그 일을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조선 성종|성종]]은 [[의정부]][[좌의정]] [[홍응]](洪應)을 파견하여 성곽의 수축, 개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 정실: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여흥 [[신애라|황려부부인]] - [[증직|증]][[의정부]][[우의정]] 민대생(閔大生)의 딸. (? ~ [[1490년]]) [[조선 단종|단종]]비 [[정순왕후]]의 모친 여흥부부인과 친사촌지간이다. 민중립의 아들 민소생, 민대생
  • 박명재 . . . . 12회 일치
         ||<-3><bgcolor=#FFCC00><:>[[참여정부|{{{#000000 '''참여 정부'''}}}]]||<#008CD7><-2><:>[[이명박정부|{{{#FFFFFF '''이명박 정부'''}}}]]||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19~20대 국회의원[br]행정자치부 장관[br]새누리당 사무총장[br][[차의과학대학교]] 총장[br]경상북도 행정부지사[br]무임소 장관[br]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br]청와대 행정비서관 ||
         현 소속 정당은 [[자유한국당]]이지만, 그 전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으며[* 이는 [[강길부]] 의원, [[조경태]] 의원도 마찬가지.], [[노무현 정부]] 시절에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이력이 있다.
         [[1947년]]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현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여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국비로 네덜란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20년 넘게 내무부, 총무처, [[행정자치부]] 등에서 근무하였는데.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참여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주요 요직과 장관직을 두루 거쳤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 때 23.1%라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했는데,(이후 지방선거에서도 [[홍의락]]이 11.8%, [[오중기]]가 14.9%에 그치며 20%는 고사하고 15%도 넘지 못했다. 이 기록은 2018년이 되어서야 오중기가 34.32%로 갱신한다.) 특히 그때 '''호남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반감이 컸었던 걸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만약 경북에 계속 도전했다면 언젠가 당선되어 지금보다 더 큰 정치인이 되었을 수도? ~~하지만 몇 번 낙선하다 한 번 당선되는 것과 새누리당 공천받아 계속 당선되는 건 차이가 있다~~] 이후 2008년까지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참여정부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송영선]]과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78aVcg_chko|관련링크]]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포항 남/울릉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이후 해당 선거에서 승리한 [[김형태(정치인)|김형태]]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치뤄진 [[2013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과거 참여정부의 장관, 열린우리당 경북지사 후보 경력을 지적하며 철새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 은혼/633화 . . . . 11회 일치
          * 양이전쟁 시절. [[가츠라 고타로]]는 "이기면 정부군, 지면 반란군"이라 말하며 자신들은 여전히 반란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적이 있다.
          * 노부노부는 동료들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며 이들이야 말로 "정부군"이라 말하는데, 가츠라는 그것을 사양하며 "반란군이면 충분하다"고 만족한다.
         >이기면 정부군, 지면 반란군?
          * 양이전쟁 시절, [[가츠라 고타로]]의 말이었다. [[사카타 긴토키]]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우린 적도 아니고 진 적도 없는데 언제까지 반란군 취급을 받는 거냐"고 투덜거린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그들 옆에는 [[사카모토 다츠마]]가 길게 누워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다카스기 신스케]]가 혼자 앉아 있다. 긴토키는 가츠라가 한 말을 놓고 끊임없이 투덜거린다. 대체 얼마나 더 이겨야 정부군으로 전직이 되냐는 것이다. 현자마냥 "깨달음의 서"라도 얻어야 하는게 아니냐면서.[* [[드래곤 퀘스트 3]]에서 고급 직업인 "현자"로 전직하려면 "깨달음의 서"라는 희소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가츠라는 어쨌든 나라에 적대하고 정부에 반하는 자들은 모두 "반란군" 취급이며 최종적으론 막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 않으면 "정부군"은 될 수 없다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성적인 대답을 한다. 긴토키는 이때나 그때나 드퀘빠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그럴 바엔 차라리 마왕 바라모스로 전직하고 만다"고 빈정거린다. 다츠마는 이때도 뭔가 핀트가 빗나간 놈이라 놀이꾼으로 전직하면 레벨 20에 정부군으로 전직할 수 있다고 헛소릴 한다. 그건 현자라고 얼간아.[* 원래 드퀘3의 현자는 "놀이꾼"이 레벨 20에서 무료로 전직할 수 있는데 놀이꾼이 막장스런 직업이라 레벨 20을 달성하는게 꽤 어려웠다. 그래서 리메이크판에선 "깨달음의 서"를 추가해서 난이도를 낮춘 것.]
          * 게임은 잘 하지 않는 사나이, 신스케는 "정부군 따윈 나라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멍청이들의 별명"이라 폄하한다.
          신스케가 뭐라 불리든, 이해를 받든 어떻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알고 있으니 된거 아니냐고 정리한다. 그러면서 어차피 우리들은 정부군이 될 주제가 아니며 역적, 국적, 반란군 같은 별명이 잘 어울리는 족속들이라 말한다. 긴토기가 발끈해서 그건 중2병인 신스케한테나 괜찮은 거라고 디스한다. 하는 김에 "귀병대"라는 이름도 걸고 넘어지는데 이딴 이름을 잘도 얼굴에 철판깔고 떠벌린다며 차라리 진주단(珍走)이란 이름이 낫겠다고 해서 옥신각신한다.
          >... 정부군인가.
          노부노부는 그 누구도 이들을 반란군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할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이야 말로 정부군이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거기서 가츠라가 대답한다.
  • 전인범 . . . . 11회 일치
         2004년 12월에는 [[:en:Multi-National Force – Iraq|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 전쟁|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ref name="a"/> 그는 [[:en:United States Armed Forces|미군]]과 [[:en:British Armed Forces|영국군]], [[:en:Australian Defence Force|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30323 이라크 총선지원 전인범 대령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 기여에 자부심”], 《서울신문》, 2005년 1월 31일</ref>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국군|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en:Bronze Star Medal|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46950 노 대통령 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연합뉴스》, 2005년 7월 11일</ref><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0706&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 이라크 총선 성공지원 공로, 전인범 육군 대령 美 동성무공훈장 받아], 《국방일보》, 2005년 7월 6일</ref>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여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군사협조단 단장으로서 [[:en: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국제안보지원군사령부]]에 파견돼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외국군을 설득할 논리가 부족하니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자고 생각하였다. 우선 [[:en:Swedish Armed Forces|스웨덴군]] 소장에게 ‘사람들 살려야 한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상황실 출입을 허가해달라’, ‘인터넷, 유선전화, 휴대전화 쓰게 해달라’, ‘숙식 제공해달라’ 등을 부탁했다. 상황실에서는 유학시절에 알고 지낸 [[:en:Bundeswehr|독일군]], 미군을 만나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ref name="a"/> 이렇게 군사협조단을 통해 수집된 인질 및 탈레반 세력의 동향 첩보 등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는데 기초자료가 됐고, 특히 인질 억류지역에서 동맹군의 불필요한 군사행동을 억제한 노력은 인질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43352 <軍, 아프간 인질 석방 숨은 공로자>-1,2], 《연합뉴스》, 2007년 9월 2일</ref>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80303&parent_no=8&bbs_id=BBSMSTR_000000000138 아프간 인질석방 공로 군인 '훈·포장' 수여], 《국방일보》, 2008년 3월 3일</ref>
         2013년 10월 [[3성 장군|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05771 전인범 특전사령관, 美 최고 공로훈장 받아], 《연합뉴스》, 2013년 11월 19일</ref> 2013년 현재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 중 최다 훈장 수상자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gunsa.kr/bbs/board.php?bo_table=B01&wr_id=151 대한민국 특전사 사령관 전인범], 《군사저널》, 2013년 12월 31일</ref>
         2015년 6월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New Westminster College)의 특별연구원(Distinguished Fellow)으로 선정되었다.<ref>[http://newwestminstercollege.ca/lieutenant-general-in-bum-chun-phd-distinguished-fellow-of-new-westminster-college Lieutenant General In-Bum Chun, BA, MS, MA, PhD, MSM, BSM, LM, NSM], 《New Westminster College》, 2015년 6월 16일</ref>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 총장 로버트 굿윈 3세는 “그는 윤리적 리더십에서 괄목한 성과를 내었고 교육훈련에 평생 동안 헌신해왔다”며 “현 세계의 국가적 안보 위협에 대한 이해는 그가 정부의 국제적, 국가적, 지역 단위 이해관계자들의 민군 상호운용성과 방위협약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리더십, 외교와 사이버 보안에 관한 연구의 설계와 전달에 있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위원회와 나는 그가 우리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새로운 특별연구원이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인범 중장은 특별연구원으로서 학문적 수월성의 최고위 기준에 대한 지원에 공헌해왔고,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과 연구원들의 세계적인 조직망 발전에 헌신해왔다고 알려졌다. 이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캐나다 국방참모총장 대장 [[:en:Ray Henault|레이 헤노]] 등이 있으며,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된 인물 125명 가운데 한국인은 그가 최초이다.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이에 앞서 그는 2월 4일 문재인 후보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이 묻는다》를 주제로 연 북 콘서트에 국방·안보분야 패널로 참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006981 문재인, 경희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 콘서트], 《연합뉴스》, 2017년 2월 4일</ref>, 문 후보를 가리키며 “이분하고 함께하면 우리나라 안보를 든든히 하고 한미 관계를 튼튼히 해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문 전 대표는 빨갱이가 아닌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문재인 캠프 합류 선언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352238 특전사령관 출신 전인범도… 문재인 캠프 ‘전방위 수혈’], 《한겨레》, 2017년 2월 5일</ref> 3성 장군 출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이 전례 없는 여론의 각광을 받자 조선일보는 “[[송영무]], [[박종헌]] 등 참모총장 출신 4성 장군 두 명을 포함, 장성 10명이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만큼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252738 [만물상] 야당으로 간 특전사령관], 《조선일보》, 2017년 2월 7일</ref> 후일 전인범 영입을 기획한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작품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ref>박성현. 2017.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089 “[집중분석] 파격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 『월간중앙』 201707호, 20-25.</ref> 당시 그를 영입하고자 다가온 많은 정치계 인사들에게 그는 군 개혁에 대하여 강하게 호소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그중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문재인 후보였기에 안보자문 합류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대선 경선 캠프에서 호감형은 아니었다는 그는 문재인 캠프 내의 안보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 복무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무슨 안보자문이냐”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ref>[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2/02/2018020200018.html [컬럼] 특전사 다목적대검 사태를 바라보며... #2], 《뉴데일리》, 2018년 2월 13일</ref> 자문위원 직은 맡았으나 [[더불어민주당]]에는 입당하지 않음을 강조한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와 차이가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546436 '文측' 전인범 "사드, 中 경제 압력 굴복 않아야"(종합)], 《뉴스1》, 2017년 2월 6일</ref> 이와 관련해 [[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존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는 두 가지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동안 한중관계를 고려해 사드 배치 재검토를 주장해온 야권과는 결이 다른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4&aid=0000474843 문재인 캠프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사드 해법’ 제시], 《스포츠경향》, 2017년 2월 7일</ref> 이에 문재인 전 대표도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로 넘겨 국회 비준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서도 “한미간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 쉽게 취소하기 어렵다”며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86840 “中 경제적 압력 굴복 말고, 美와 사드 합의 존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2월 6일</ref> 그의 문재인 캠프 합류에 실망한 일부 보수세력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충분히 분노하시는 마음을 이해합니다”라며 “제가 이번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7만원짜리 특수작전 칼([[:en:Survival knife|서바이벌 칼]])을 부결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조용히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문재인 지지 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252237 文 캠프 합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페친 5000명 중 28명 이탈했다"], 《조선일보》, 2017년 2월 5일</ref> 친정인 군을 향한 비판에 육군은 공식 브리핑에서 “특전사 장병들이 생존용으로 사용하는 특수작전 칼을 당초 7만원씩에 구입하려고 했으나 더 나은 15만원짜리로 구입하기로 하고 2022년까지 모두 18억500만원을 예산에 편성했다”고 해명했으나, 2017년 예산에는 특수작전 칼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3233 전인범과 육군의 ‘칼 싸움’], 《중앙일보》, 2017년 2월 7일</ref> 육군 관계자는 시범사업으로 구입했다가 나중에 평가에서 합격해야 향후 5년간 18억원으로 칼을 구입하게 된다는 뜻에서 “올해는 시범사업으로 소량만 구입할 예정이며 예산은 5000만원”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 전태일 . . . . 11회 일치
         노동운동의 대부로 인식되는 탓에 그를 마치 반정부적이고 반체제적인 인물로 왜곡된 인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보낸 탄원서에서도 그는 '대통령은 국부이고, 곧 저희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극히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주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
         ==== 정부 탄원 실패 ====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방치당하고 있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 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ref name="chock283"/>" 한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재킷|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ref name="chock283"/>" 한다.
         당시 [[신민당 (1967년)|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98) 27쪽</ref> 이후 [[신민당 (1967년)|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전체 노동자들이 겪고있는 인간이하의 고통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했다. [[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결국 [[2005년]] [[4월]] 1억 4천만원의 추가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정부는 4일 국무회의를 열어 이같은 보상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률 일부 개정령'을 의결했다.<ref name="yubbo">[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society/200504/h2005040421021222100.htm&ver=v002 전태일 열사 1억 4천만원 추가보상] 한국일보 2005/04/04</ref> 이에 따라 전태일 열사의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이 추가로 보상되었다.<ref name="yubbo"/>
         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ref name="sangcahm">함규진, 《역사법정:한국사 인물논쟁》 (포럼, 2006) 330페이지</ref> 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ref name="sangcahm"/>"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써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평전에 전태일이 쓴 일기가 실려있는데, [[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들은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 트로피코 4/건물 . . . . 10회 일치
         == 정부 기관 ==
         === 정부청사 ===
         ||정부의 심장부로서, 장관들이 아무 짓도 안 하는 주제에 엄청난 연봉을 챙기는 장소입니다.
          * 경제, 교육, 외교부, 행정부, 국방부 장관을 임명 가능
          * 평의회: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민주 정부입니다. 섬의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 인민 위원회: 많은 시민들이 대통령 각하께 투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산주의 정부입니다. 만약 하지않는다면…
          * 군사정부: 군사정부가 반역자가 되려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지를 꺾어버립니다.
         ||시민들이 일은 정말 잘 하지만, 수나 기술력이 부족하다면 외국의 노동자들이 필요합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시민들이 문화 사대주의에 심취하여 정부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평소에 충분히 대비를 해 두세요.
         ||무기 없는 혁명은 하릴없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무기고들을 확보하신다면 저렴한 경계 초소를 건설할 수도 있고, 정부의 통제력을 확충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경계 초소엔 장교가 한 명은 필요하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싶으시다면 그만큼 무기고를 많이 건설하시면 된답니다.||
  • 피우진 . . . . 10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4012D><-5><bgcolor=#FFFFFF><:>{{{+1 [[대한민국 정부|[[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글자없음).png|width=30]]]] [[대한민국|{{{#04376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043762 '''국가보훈처'''}}}]] [[처장|{{{#043762 '''처장'''}}}]]}}}||
         ||<-2><bgcolor=#C01920><:>[[박근혜정부|{{{#FFFFFF '''박근혜정부'''}}}]]||<-3><bgcolor=#1870B9><:>[[문재인 정부|{{{#FFFFFF '''문재인 정부'''}}}]]||
         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장]]이다. 전 [[체육교사]],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육군]] 항공 장교에서 여성 1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에 의해 최초의 여성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되었다.
         1979년, 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훈련 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육군|육군]] [[학사장교]] [[소위]]로 임관하였다. 여담으로 같은 해 임관한 인물로는 [[박선우]], [[신현돈]]이 있다. '''즉 [[문재인 정부]] 첫 육군 참모총장인 [[김용우(1961)|김용우]] 대장[* 1983년 임관.]보다 무려 4년 선배이다.''' [[여군]] 훈련소 [[소대장]], 여군 [[특전사]] [[중대장]]을 거쳐 1981년부터 육군의 [[헬기]] 조종사로 근무하였고, 2002년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2017년에 [[양승숙]] 준장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을 지지하였고,[* [[여군]]들은 보통 진보적인 친 [[더불어민주당]] 성향이 강하다. 반대로 [[남군]]들은 보통 보수적인 친 [[자유한국당]] 성향이 강하다. (다만 남군의 경우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민주당 성향이 강한 경우도 있는데, 보통 장병 복지 및 처우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민주당 쪽으로 지지하게 된다. [[백군기]] (예)대장이 그 예시.) 하필 피우진이 [[여군]] 인권 이슈를 내놓을 수 있던 자리에서 [[문재인/2017년#s-4.1|동성애자 난입]]이 일어나, 피우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실패하는 씁쓸한 일화가 있다.] 대선이 끝난 후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가보훈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임 국가보훈처장은 모두 예비역 중장이었지만 [[문재인]]이 주요직위자의 문민화를 위해 여군 출신의 피우진을 이 자리에 보직시켰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한국군/여군]][[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고위 공무원]][[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1956년 출생]][[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관]]
  • 김진선(군인) . . . . 9회 일치
         ||<#000080><-4><:> [[노태우 정부|{{{#FFFFFF ''' 노태우 정부 (1988 ~ 1993) ''' }}}]] ||<#003990><-1><:> [[문민정부|{{{#FFFFFF ''' 문민정부 (1993 ~ 1998) ''' }}}]] ||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노태우]]계 군인을 지칭하는 9.9 인맥의 (노태우가 사령관이었던 9공수여단, 9사단에서 노태우의 참모나 휘하 부대장을 한 인사들) 핵심이었다. [[제7보병사단]] [[사단장]] 등을 지냈다. 준장 때, [[국군체육부대]] 초대 부대장을 역임했다.
  • 안병용(기초단체장) . . . . 9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237BBD><#FFFFFF><-5><:> {{{#1FADA6 경기도}}} {{{#1FADA6 의정부시장'''}}}||
         [[대한민국]]의 교육자 출신 [[정치인]]이다. 현직 경기도 [[의정부시]]장으로 당적은 [[더불어민주당]]이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2008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현직 시장인 [[김문원]] 시장이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써 보수 표가 분산되어서 당선될 수 있었으며, [[한나라당]] 김남성 후보가 [[경민대학교]] 교수여서 경민학원의 [[홍문종(정치인)|홍문종]], 신흥학원의 [[강성종]] 간 대리전이라는 분석이 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의정부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번에는 김문원 전 시장의 지지 선언을 받았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정부시장 후보로 단수공천이 확정되었고 3선에 성공하였다.
         의정부시에서 열리는 행사들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특별 명함을 나눠준다. 5개를 모으면 [[짜장면]]을 사준다고 한다. 평소에 민심을 많이 생각하는지 돌아다니는 빈도수가 많아 5개를 모으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걸 들고 어디로 가냐가 문제지... ~~들고 시청으로 동시에 진격하면.. 기삿거리 생겼다고 좋아한다~~
         || 2010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 의정부시장) || '''[[민주당(2008년)|민주당]]''' || '''71,067 (44.50%)''' || '''당선 (1위)''' || ||
         || 2014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 의정부시장) || '''[[새정치민주연합]]''' || '''87,959 (51.82%)''' || '''당선 (1위)''' || ||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 의정부시장) || '''[[더불어민주당]]''' || '''127,676 (65.35%)''' || '''당선 (1위)''' || ||
  • 정환덕 . . . . 9회 일치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종소]](鄭從昭)의 12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영월 환고사에 배향된 현령 증 병조판서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대구부의 청호서원(淸湖書院)에 배향된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의 8세손이다.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 [[정하형]](鄭夏亨)의 증손이며,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丞) [[정윤휴]](鄭胤休)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선전관(宣傳官)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군부협판(軍部協辦) [[정의채]](鄭義采)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와 증 정부인 주씨(貞夫人 周氏)이다.
         부인은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와 정부인 이씨(貞夫人李氏)이다.
         *어머니 : 증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
         **증 정부인 주씨(貞夫人 周氏)
         *부인 :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
         **정부인 이씨(貞夫人李氏)
         *손자 : 정부용(鄭富鎔)
  • 트로피코 4/칙령 . . . . 9회 일치
         시민의 마음을 선동하는 반정부적 서적을 모두 태워버린다. 지식인의 수가 50% 줄어들며 지식인이 될 확률도 50% 감소한다. 불태워버릴 책에는 교과서도 들어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숙련도가 50% 감소한다.
         == 행정부 ==
          * 행정부 장관 필요
          * 행정부 장관 필요
          * 행정부 장관 필요
          * 비밀 경찰, 행정부 장관 필요
          * 성당, 행정부 장관 필요
          * 죄수, 행정부 장관 필요
         1980년에 쿠바 정부가 미국으로 가는 망명자 행렬에 범죄자와 병자들을 끼워넣은 것에 대한 패러디로 보인다.
  • 김덕 . . . . 8회 일치
         ||<#003990><-5><:> {{{#FFFFFF ''' 문민정부 (1993 ~ 1998) ''' }}} ||
         ||<#000080><-2><:> [[노태우 정부|{{{#FFFFFF ''' 노태우 정부 (1988 ~ 1993) ''' }}}]] ||<#003990><-3><:> [[문민정부|{{{#FFFFFF ''' 문민정부 (1993 ~ 1998) ''' }}}]] ||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원장|부장]]에 임명되었고, 1994년 12월까지 부임하였다. 1994년 12월 내각 개편으로 통일원(현 [[통일부]]) [[통일부 장관|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기 문건이 논란이 되어 같은 해 2월 경질되었다.
  • 김보름 . . . . 8회 일치
         2015년 12월 22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팅장에서 열린 제70회 전국남녀 종합선수권대회 3000m에서 4분17초39의 기록으로 정상에 올랐던 김보름은 23일 첫 종목으로 나선 1500m에서 2분3초27을 기록하며 노선영(강원도청, 2분5초17)과 박지우(의정부여고, 2분5초83)에 앞서 1위에 올랐다. 또 5000m 종목에서도 김보름은 7분41초07을 기록하며 박지우(7분47초77), 장수지(유봉여고, 8분9초47)를 크게 앞질렀다. 22일 열렸던 500m 종목에서 41초39로 3위에 올랐던 김보름은 종합점수 171.485점을 받으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656|제목='매스 스타트 희망' 김보름, 전국선수권 여자부 종합 우승|날짜=2015-12-23|언어=ko|확인날짜=2017-03-25}}</ref>
         2016년 10월 26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51회 전국남녀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4분17초63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김보름은 28일 1500m에서 2분02초76으로 우승했다. 김보름은 지난해 이 대회에서 1500m, 3000m 2관왕에 오른데 이어 2년 연속 2관왕을 차지했다. 여고 졸업반 박지우(의정부여고)는 2분04초77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노선영(강원도청, 2분05초72)은 3위에 올랐다.<ref name=":22" />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2016-2017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21로 3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2일 열린 팀추월에서 이승훈과 김보름이 힘을 보탠 남녀 팀추월 대표팀이 동메달을 나란히 수확했다. 13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이승훈이 남자부 금메달, 김보름이 여자부 동메달을 목에 걸며 메달 사냥의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ref>{{뉴스 인용|url=http://d.kbs.co.kr/news/view.do?ncd=3380743|제목=이승훈·김보름, 매스스타트서 ‘맹활약’|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1월 18일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05초91로 16명 가운데 6위에 올랐다. 자신의 최고 기록(4분04초62)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2016년 11월 11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월드컵 1차 대회 디비전B에서 세운 4분12초21보다 6초30 빨랐다. 우승은 체코의 마르티나 사블리코바가 4분03초56으로 차지했다. 그 뒤는 안토이네트 데 용(네덜란드-4분04초53), 안나 유라코바(러시아-4분05초24)가 이었다. 3000m 디비전B의 박지우(의정부여고)는 4분18초88로 20명 가운데 16위에 자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sn.com/ko-kr/news/sports/%EB%B9%99%EC%83%81-%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2%EC%B0%A8-%EC%9B%94%EB%93%9C%EC%BB%B5-%EF%A6%81-3000m-6%EC%9C%84/ar-AAkrY2E|제목=[빙상] 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2차 월드컵 女 3000m 6위|확인날짜=2017-03-27}}</ref> 19일 열린 팀추월 결승에서는 대한민국(노선영, 김보름, 박지우)이 3분05초01로 5위를 차지했다. 20일 김보름은 박지우와 함께 23명이 출전한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8분15초02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골인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박지우는 8분22초85로 18위를 기록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9초65로 2위에 올랐고 박지우는 2분01초89로 16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ufo5405/22086629640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금메달(2016~2017 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뉴스=네이버 블로그 {{!}} 자유 평화 사랑|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2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0초61로 14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4초62로 6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5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29초51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2차 대회 우승자인 캐나다의 이바니 블롱댕(8분29초28)과 일본의 다카기 나나(8분29초46)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에서 랭킹 포인트 7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총점 240점으로 블롱댕(랭킹포인트 280점)에 이어 월드컵 랭킹 2위를 유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n.kbs.co.kr/news/view.do?ncd=3388523|제목=이승훈·김보름, 3차 대회 매스스타트 동메달|뉴스=KBS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6년 12월 9일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벌어진 월드컵 4차 대회 팀추월에서 박지우, 노선영, 김보름은 3분06초42로 7위를 차지했다. 10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71로 19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10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31초73의 기록으로 이린 쇼우텐(네덜란드)을 0.09초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김보름은 일본 나가노에서 열렸던 2차 대회에 이어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두번째 금메달을 차지하며 월드컵 랭킹 점수에서도 340점을 확보, 이바니 블롱댕(캐나다, 308점)을 제치고 선두로 올라섰다.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1차 대회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3차 대회에서 금메달, 2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블롱댕은 8분33초59로 10위로 밀려나면서 4회 연속 메달 사냥에 실패하고 김보름에게 월드컵 랭킹 선두 자리를 내줬다. 함께 김보름과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박지우(의정부여고)는 8분41초67의 기록으로 14위에 올랐다. 박지우는 3차 대회 13위에 이어 4차 대회에서도 줄곧 중위권을 유지하며 월드컵랭킹 52점으로 18위로 올라섰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576|제목=김보름 매스스타트 '동-금-동-금 행진', 이젠 당당한 평창 우승 후보|날짜=2016-12-11|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11일 열린 5000m 디비전A에서 7분17초89로 12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7년 3월 12일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45초75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네덜란드의 이린 쇼우턴(8분45초69)에 단 0.06초 뒤지는 2위에 그쳤다. 3위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카 롤로브리기다(8분45초78)가 차지했다. 매스스타트 랭킹 포인트 120점을 획득한 김보름은 합계 460점으로 364점의 롤로브리기다를 여유 있게 제치고 시즌 1위 자리를 지켜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1.kr/articles/?2934262|제목=[빙속] ISU 월드컵 파이널 매스스타트 이승훈金-김보름銀|날짜=2017-03-13|뉴스=뉴스1|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2016년 12월 29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71회 종합스피트스케이팅선수권대회 5000m에서 김보름은 1위를 기록하며 3관왕을 차지해 여자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김보름은 27일 3000m, 28일 1500m 1위를 차지한 뒤 마지막 날 5000m까지 석권했다. 종합 2위는 박지우(의정부여고), 3위는 박도영(동두첮시청)이 차지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윤곽이 나왔다. 중장거리(1500m, 3000m)에서는 김보름, 박도영, 박지우(의정부여고), 노선영(강원도청), 장수지(서울 일반)가 선발됐다. 여자 5000m는 김보름이 뽑혔다. 매스스타트는 3000m 1위 김보름과 2위 박도영, 추천선수 1명이 나선다.<ref>{{뉴스 인용|url=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1229185500007&site=1000000000|제목=-빙속- 삿포로AG 대표팀 윤곽…이상화·김보름·이승훈 태극마크|날짜=2016-12-29|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17년 1월 2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47회 회장배 전국남녀 스피드스케이팅대회 500m 일반부 경기에서 김보름은 41초54의 기록으로 윤지원(동두천시청), 김유림(의정부시청)을 따돌리고 정상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winternews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32352|제목=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간판 김보름, 회장배 500m 1위 - Winter News Korea|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3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임정수, 노선영으로 구성된 강원도청팀이 3분40초63의 대회신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616&detailClassCd=08&rhCd=19&page=2&gameDate=&baseClassName=6%EC%A3%BC%20%ED%8C%80%EC%B6%94%EC%9B%94&rhName=%EC%A2%85%ED%95%A9&kindCd=10&kindNm=%EC%97%AC%EC%9E%90%EC%9D%BC%EB%B0%98%EB%B6%80&pcntGbn=T&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6}}</ref>
         2017년 2월 20일 오후 일본 오비히로의 오비히로 스피드스케이팅 오벌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7초80으로 2위를 기록했다. 김보름의 기록은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카자흐스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호즈미 마사코(일본)가 세웠던 4분7초82보다 0.02초 빨랐다. 하지만 4분05초76을 기록한 다카기 미호(일본)에 밀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다카기의 기록은 아시아 기록으로 올라갔다. 3위는 4분10초07를 찍은 일본의 사토 아야노가 차지했다. 이로써 김보름은 2011년 대회에 이어 2연속 3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게 됐다. 5조의 인코스에 자리한 김보름은 타카바 마키(일본)와 레이스를 펼쳤다. 초반 400m 랩타임을 31초대로 찍으면서 좋은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속도가 떨어졌고 마지막 800m를 남겨두고는 400m 랩타임을 32초 후반대로 찍으면서 아쉽게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김보름과 함께 출전한 박도영(24-동두천시청)은 4분17초76로 6위. 박지우는(19-의정부여고)는 4분21초02로 7위를 마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fnnews.com/news/201702201641040417|제목=[동계AG] 김보름,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 획득|날짜=2017-02-20|확인날짜=2017-03-31}}</ref> 22일 열린 5000m 경기에서는 김보름이 7분 12초 58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3조에 출전한 김보름은 한 메이(중국)와 레이스를 펼쳤다. 김보름은 레이스 초반 33초 대로 달리다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33초와 34초의 랩타임을 번갈아가며 호흡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3바퀴를 남기고 스퍼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7분12초58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금메달을 확정 지었다. 이 날 경기에서 김보름을 위협할 강력한 경쟁자로 꼽힌 다바카 마키(일본)는 레이스 후반에 접어들면서 크게 처져 결국 메달조차 따지 못했다. 김보름에 이어 은메달은 한 메이, 동메달은 키야마 마이가 차지했다. 김보름과 함께 출전했던 박도영(동두천시청)은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김보름은 20일 열렸던 3000m와 21일에 열렸던 팀추월 경기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자신의 세 번째 종목이었던 5000m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다.<ref>{{웹 인용|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01052|제목=빙속 김보름, 동계 아시안게임 5000m 금메달|날짜=2017-02-22|확인날짜=2017-03-29}}</ref> 23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일본 선수들의 작전에 말려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날 다카기 미호와 사토 아야노가 먼저 치고 나섰고, 뒤에 있던 다카기 나나가 상대 선수들을 견제했다. 김보름은 선두를 따라 잡기위해 기회를 노렸지만 추월하지 못했다. 이후 김보름이 속한 2위그룹과 선두그룹은 12바퀴이후 한 바퀴까지 벌어졌다. 결국 김보름은 8분47초46을 기록 3위에 그쳤고, 다카기 미호는 8분21초81로 금메달, 사토 아야노는 8분21초88로 은메달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pim.com/news/view/20170223000380?category_cd=0116|제목=김보름 “일본 작전에 알면서 당했다”... 매스스타트 1인자, 아쉬운 동메달(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뉴스=뉴스핌|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 몽키 D. 루피 . . . . 8회 일치
         동료나 가까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무모함의 이유 중 하나다. [[세계정부(원피스)|도저히]] [[임펠 다운|승산이]] [[정상결전|없는 상황]]이라도 동료가 위험하면 싸움을 건다. 어느 때나 동료의 강함을 믿는 것은 루피가 가진 리더십의 원천이지만, 오히려 일당 전체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샤본디 제도에서 천룡인만 때리지 않았어도 밀짚모자 일행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밀짚모자 해적단 선원 대부분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대응을 하는 해적단이었으면, 처음부터 입단할 일이 없었다. 실제로 정작 당사자인 선원들은 하찌가 총에 맞아서 천룡인을 때린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조로는 천룡인을 베려고 검을 뽑았다가 루피가 선수를 치자 검을 다시 집어넣기도 [* 선장의 행동이라고 무조건 허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정말 무모하게 행동할 때는 선원들도 저지한다.][* 즉 루피가 무모하고 정신나간 성격인 것은 맞지만 어차피 여기에 들어온 인간들이 죄다 비슷한 인간들이다.(…) 나미, 조로, 상디, 우솝 등은 자신들이 루피보다 상식적인 인간이라 여기며 실제로도 루피보다'''는''' 상식적인 인간이지만 주변 평가는 '''다 똑같은 미친 것들'''(…)]
         [[니코 로빈]]을 구하느라 [[에니에스 로비]]를 박살내고, 포트거스 D. 에이스를 찾아 [[임펠 다운]]을 작살냈다. 뒤이어 [[해군본부(원피스)|해군본부]]를 뒤엎는 데도 한 몫 했다. 즉 루키 주제에, 그것도 최하위급 악마의 열매 능력자가 열기도 힘든 정의의 문을 넘고 넘어서 세계 정부의 중요기관 3개를 골고루 털었다.
         이것은 딱히 도플라밍고처럼 해적이 일개 국가를 소유한다거나 산하에 두는 것은 아니기에 국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무력을 행사하여 적개심을 사지 않아도 루피 본인 의향만으로 여러 국가에 강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으로, 국가마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워터세븐 시장이 손수 해적선을 조선해준 일이 있고[* 얘가 해적왕이 되기라도 하는 '''순간 불법행위로써 인정'''된다. 그렇게 되기 전이라 해도 루피가 에니에스 로비를 개작살내고 온 직후이니 세계정부에게는 미움받고도 남을 일이다. [[톰(원피스)|톰]]역시도 그저 해적왕의 '''배를 건조했다는 죄로 사형'''당한 상황을 보면 아이스버그도 스승과 똑같이 끝장날 수 있다. 다만 나서서 도와줄 이가 없었던 톰과는 달리 아이스버그는 그를 열렬하게 존경하고 걱정하는 시민들이 있다. 물론 밀짚모자 일행들도 아이스 버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만큼 이들이 아이스버그의 사형을 순순히 묵인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톰의 경우에는 스팬담의 온갖 방해공작이 있었다. 더군다나 워터세븐 마무리에서 아이스버그가 설계하고 있던 '워터세븐 전체를 바다에 띄우는 일'이 성공한다면 그의 위상이 과거의 톰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밀짚모자 일당의 새 해적선 [[사우전드 써니 호]]에 대한 건조는 밀짚모자 일당과 소수의 관계자만이 아는 일인 만큼 죄를 묻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톰의 경우, 본디 조선공은 해군이건 해적이건 일반인이건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한 배를 건조하는 행위 자체는 죄를 묻지 않으나 톰의 경우는 그가 건조한 배가 다름아닌 '''해적왕 골 D. 로저의 기함, 오로 잭슨 호''' 였던만큼, 해적왕과 관계된 이들을 전부 숙청하려는 해군 본부의 표적이 된 것이다. 또한 스팬담의 음모로 [프랑키|커티 프람]이 만들었던 전투함들이 사법선을 습격했을 당시, 오로 잭슨 호의 건조 건은 바다열차 퍼핑톰의 제작으로 사면받는다 쳐도 사법선 습격 건이 그대로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바다열차 건으로 사면받고 [아이스버그|자신의] [프랑키|제자]들을 위해 오로 잭슨 호 건조에 대한 죄를 받아들여 처형된 것이었다.][* 다만 문맥상 중요한 것은 일개 도시의 시장, 세계관 상으로는 국왕하고도 맞먹을 정도의 권력자가 세계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해 주었을 정도로 밀짚모자 일당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처벌 받는다 안 받는다 여부가 중요한 점은 아닌 것(…)~~병림픽~~]어인섬의 경우는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국왕이 못을 박아두는 장면이 나왔고[* 밀짚모자 일당에게 감사인사란 감사인사는 죄다 퍼부은 뒤였기 때문에 단순히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출은 아니다. 어인섬에는 루피에게 붕괴당한다는 플래그도 서 있기 때문에 차후 재등장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알라바스타 왕녀는 비공식적이나마 밀짚모자 일당에 소속되어 있는 등 그 정도가 '''여차하면 특정 세력에게 적대 성향을 가지게 할 여지도 충분히 있기에''' 이미 심상치 않다고 말할 수준을 몇 단계 뛰어넘었다.
         원피스의 최종보스 세력으로써 점쳐지고 있는 것이 세계정부이며 세계정부에 정면으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인 반란군의 수장이 루피의 아버지인 데다가 2년간 니코 로빈이 임시적으로 반란군과 행동을 함께 한 행적이 있어 밀짚모자 일당과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세계정부 측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 어인섬 국왕 넵튠의 무거운 일언 등에서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 되던간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내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 로빈의 적이 누군지 잘 알았다. 저격왕… '''[[세계정부(원피스)|저 깃발]], [[선전포고|쏴 버려.]]'''
  • 박경석(1933) . . . . 8회 일치
         이후, 전장에서 더 많은 위관장교 자원을 필요로 하자 정부는 이들을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12.12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동 사건 당시 육본 측에 있었고 갑종 전우회 대부였던 [[하소곤]]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두환]]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오자복]] 예비역 대장,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예비역 대장, [[박정희]] 정부에서 경호실장을 지낸 [[차지철]] 예비역 중령 등이 육군 종합학교 출신이다.]에 입교시켜 단기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켰다. 박경석 소위도 이 때 임관된 초임장교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생도 2기 출신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새로 신설된 제9사단[* 사단장 [[장도영]], --5.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얼굴마담, 핫바지 노릇했던 그 때 그 사람-- 사단 참모장은 [[박정희]] --5.16 군사정변에서 대통령에 오른 그 분--]의 소대장으로 갔다. 그 1명은 당시 권력자였던,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의 아들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는 임관과 동시 후방의 육군본부로 배속받았다.[* [[원용덕]] 장군도 최종 보직이 헌병 총사령부 사령관이었고, 아들 [[원창희]] 장군도 헌병의 꽃 헌병감 보직을 마지막으로 육군 준장에서 전역하였다.]
         1951년쯤, 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미 8군의 도움으로 육사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위 신분이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사 생도 복귀를 놓고 논쟁하다가 결국은 새로운 모집 공고에 의한 [[육군사관학교]] 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등이 판을 치던 그 육사 11기생들이 첫 정규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다.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군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 야당과 여당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월남 파병에 있어 한국군의 처우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특히나 집권 여당 공화당의 초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변호사는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의 월맹은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거요.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 정책의 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에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오.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다가 피를 뿌리며 돈을 벌기보다는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것이 옳다는 생각이오."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8576|[[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발췌. [[http://gyuraeman.blog.me/110018127454|(대한 군사 원조의 약속인 브라운 각서)]]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포함한 경제적 원조와 월남이라는 특수 시장 개척에 한국 기업을 포함한다는 파병의 조건으로 협상하였다.]
         [[재구대대]][* 초대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 이어 정치군인 [[노태우]], [[박희도]] 등이 줄줄이 이 자리에 앉앗다]는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 파병 군사 훈련을 받던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중대원을 살린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준 [[강재구]] 대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대대이다. [[재구대대]]는 그 이름답게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그런 재구대대의 초대 대대장에 박경석 중령이 임명되었다.[[http://cafe.daum.net/pks6464/MnHf/114|재구대대를 포함한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상은 파병부대를 지휘한 장군들의 각종 수기에 나와 있지만 박경석 장군의 재구대대장 시절의 회고부분은 월남전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군은 월남 파병에 있어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독자적인 한국의 작전지휘권과 기타 수송분야의 한국업체의 참여를 미국에 정식 요청하였고, 협상 끝에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자체적인 작전지휘권을 얻어냈다. 이에 탄생한 것이 바로 [[http://panzercho.egloos.com/2765059|중대기지전술]]이다. [[주월한국군]] 전투부대는 각 마을마다 중대별로 기지를 세워, 민간인과 월맹군.베트공의 민간 침투를 차단하는 이른바 물과 물고기를 분리한다는 전술을 통해 지역 민간인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투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수월해졌다. 나중에 이 작전이 성공하자 대만과 기타 자유진영의 군사고문단이 배우고 가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 유인촌 . . . . 8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8CD7><bgcolor=#FFFFFF><height=50><-5><:>[[대한민국 정부|[[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구).png|width=50]]]] {{{+1 '''[[대한민국|{{{#043762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043762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043762 장관}}}]]'''}}}||
         ||<-5><bgcolor=#008CD7><:>[[이명박정부|{{{#FFFFFF '''이명박 정부'''}}}]]||
          * [[가톨릭]] 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남동생은 [[성직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이다. 2013년부터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을 근거리에 모시는 요직인 보좌주교를 담당하고 있다. 유경촌 주교가 막 신부가 됐을 적에, 배우 유인촌의 동생이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http://m.pbc.co.kr/paper/view.php?cid=490221&path=201312|기사]]. 형제의 정치적 성향은 다른데, 유인촌이 보수정권 하에서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보수성향이고, 동생 유경촌 주교는 카톨릭 내에서 진보적인 인사로 사회교리를 전공하였고, [[신부(종교)|신부]] 시절에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교리 전공 교수를 역임했다. 유인촌 본인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 [[개신교]]([[장로회]])를 잠시 믿었다가 이후에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된 후인 2015년 11월 22일에 논현2동 [[성당]]에서 동생인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로부터 [[견진성사|견진]]을 받았다. [[http://rose6217.blog.me/220557780401|같이 견진 받은 사람의 대모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보면 [[박인환]]과 [[이형석]]과 더불어서 견진을 받은 사진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 완전한 [[개종]]보다는 개신교 신자인 이명박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잠시 붙어다니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 [[본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거나 크게 잘못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전파인증]] 규제를 완화시켜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10만 원대 휴대폰을 사서 전파인증으로 30만 원을 더 날려야 했을 것이다. 그가 전파인증 규제 완화를 시켜주게 된 계기는 바로 [[iPad]]. 국내에 아이패드가 출시되기 이전인 2010년 그가 방송에 직접 나와 발표를 하는데 아이패드를 쓰는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었던 것. 당시는 외산단말기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파인증을 반드시 받아야 했으며 아이패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해주세염 하면 ㅇㅋ 하고 몇분만에 뚝딱 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30만 원이 넘는 비용을 내고 내부 회로도까지 직접 제출해야''' 가능했다. 이게 일반인 선에서 가능할리가 없다. 유인촌이 불법을 저지른것도 아니고 30만원에 내부 회로도 제출이 가능한 위치에 있으니 그 자체를 큰 문제라고 할 순 없지만 국민들은 비용과 절차 문제로 못쓰는걸 정치인인 장관은 태연히 방송에 나와 쓰는 모습 자체가 박탈감을 불러와 국민여론이 굉장히 안좋게 작용했다. 결국 정부는 '1인 1기는 전파인증 없이 반입 가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유인촌은 한동안 비꼬는 의미에서 '''[[문익점|문익촌]]'''으로 추앙을 받았다.
         [[이명박]] 정권 초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08년 국정감사 도중, 야당 측의 [[이종걸]] 의원의 질의에 기분이 단단히 상했는지 '''"[[사진]] 찍지마! [[씨발|X발]] 찍지마!"'''라고 [[기자(직업)|기자]]들을 향해 [[반말]]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이종걸 의원의 질의부터가 굉장히 무례했다. 'MB 정권의 휘하, 졸개' 운운한 것도 모자라서 그래 '사기극', '삼켜먹어버렸다.' 등의 과격한 [[단어]]들을 대놓고 내뱉었으며, 심지어는 [[호칭]]도 안 쓰고 그냥 '이명박의~'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설, 특히 기자들에게까지 [[막말]]을 했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대응이 아니었고, [[인터넷]]에서는 이종걸의 발언은 묻혀지고 이 욕설만 남고 말았다.국감이라는게 그런것이다. 질문자인 국회의원은 무슨 개같은 질문을 하든 묻히고, 발끈한 정부만 남는게 국감이라 10년이 지난 지금도 질문들을 개같이 한다. 유인촌입장에선 억울할법도. 연기하는 배우라서 오히려 카메라를 신경쓰지 못했나 싶을 정도. 아이돌 출신이면 카메라 신경썼을텐데..
         [[2017년]] [[가을]],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의 작성이나 실행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나와서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164108|기사]]. 일단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2965355|기사]].
  • 이갑성 . . . . 8회 일치
         [[1927년]]부터는 [[허헌]], [[김병로]], [[이인]], [[허정숙]], [[조병옥]]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귀국,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윤치호]]의 신원 보증으로 풀려났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생겼다. 이갑성은 [[1971년]] [[12월 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라는 것이다. [[한민당]]의 창립 발기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1945년]] [[10월]] 우후죽순 생겨난 정당, 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목적으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했고, 수십개의 단체들 중 뜻이 맞거나 성격이 비슷한 단체들은 통합되었다.
         ===== 이승만 정부 초반 =====
         [[1956년]] 정,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일시 탈당하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으나 군소부호로 낙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1981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국의 약학자]][[분류:한국의 약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종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의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약사]][[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분류:한국의 군정기]]
  • 이인 . . . . 8회 일치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1946년]] 군정청 검찰청 검찰총장이 되어 [[조선정판사위폐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파 세력의 근절에 노력했으며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이후 단독정부 수립론이 나오자 그는 단정론을 지지하였다.
         ==== 정부수립 참여 ====
         1954년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7년에는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범야세력 통합운동을 벌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재야정치인들과 함께 [[이승만]](李承晩)의 하야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유교 신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조선어학회 사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이승만| ]][[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진격의 거인/86화 . . . . 8회 일치
          * 지크가 일곱 살이 될 무렵, 마레 정부는 파라디섬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엘디아인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병사를 모집한다.
          * 마레 측은 정부 관리 하의 "일곱 거인"을 계승시킨다는 계획.
          * 이들은 그리샤가 의사이며 마레 정부에 원한이 있는 것에 주목해서 반체제 조직 "엘디아 복권파"에 그를 가담시키려 한 것이다.
          * 엘디아 복권파는 "올빼미"라 불리는 정부의 내통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 마레 정부는 엘디아인을 상대로 "병사"를 모집한다고 발표한다.
          * 일곱 살이 된 지크는 마레 정부에 부모님과 엘디아 복권파를 고발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샤 예거가 멋대로 추정한 역사. 올빼미라는 정부 측 인물이 빼돌린 자료를 기반으로 구성한 것인데, 정작 그리샤 본인도 고대어는 전혀 할 줄 몰랐고 몇 가지 삽화와 자신들의 망상을 기반으로 꾸며낸 것이다. 일단 다이나 프리츠가 가져온 자료와 대조해 볼대 대체로 맞았던 걸로 보이는데, 사실 다이나 프리츠의 정체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며 자료와 다이나 모두 올빼미가 보냈다는 점에서 사전에 조작된 정보를 주었을 가능성도 높다.
         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마레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일곱 명의 거인 전원과 그외로 보인다.
  • 김만제 . . . . 7회 일치
         귀국하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다.[* 이 때문에 역시 서강대에서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던 전임 [[남덕우]], 후임 [[이승윤(정치인)|이승윤]] 경제 부총리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종인]] 등과 더불어 서강 학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82년까지 재임하였다.
         한국개발연구원장 퇴임 후 잠시 [[한미은행]]장을 지내다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제5공화국]]의 경제정책을 주도하였다.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은 소위 3저(低)[* 낮은 물가, 금리, 석유가격을 뜻한다.]로 대표되는 경제 호황기로 수출 증대,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국내외적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후임 [[노태우]] 정부의 출범 후, 이 때의 부실기업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 김재연 (1980년) . . . . 7회 일치
         2013년 9월 5일에는 [[통합진보당]]의 당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이후인 11월 6일에는 자당 의원들과 함께 삭발을 한 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16일째인 11월 21일 건강악화로 병원에 후송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10722</ref>
         통합진보당에서 이석기와 김재연에 관한 출당 절차가 진행되던 2012년 5월, 김재연은 서울에서 경기도 의정부시의 시댁으로 전입했다. 5월 21일 현장을 방문한 [[헤럴드경제]]는 1면 기사를 통해 김재연의 시댁이 300평 대의 넓은 전원주택이며, 차고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주차돼 있었다고 보도했다.<ref>[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0521000582&md=20120617062559_AV] 2012.05.22 '럭셔리' 김재연 시댁…300평대 주택-차량 3대]</ref> 헤럴드경제는 시댁의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의 입을 빌려 실제 김재연이 이곳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같은 자리에서 김재연은 "[[연평해전]] 도발들이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평화를 위해 공격을 해오더라도 참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맞불을 놓으면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며 "오히려 지난 (이명박 정부)5년 동안 남북관계 매우 심각히 경색되면서 더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남북화해모드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친북인사냐"란 물음에는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6/h2012060502431521060.htm 김재연 "北이 공격해도 남한은…" 발언 파장] 2012년 6월 5일 한국일보</ref>
         새누리당의 [[이장우]] 의원은 김재연이 [[김일성주의]]를 추종한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2013년 11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김재연은 "1%에 쏠린 정치권력을 99%에게 나눠주겠다.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일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자리에 앉아 듣고 있던 이장우가 "그것이 김일성주의인거다"라고 야유를 보냈고, 김재연은 즉각 사과를 요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10625</ref> 이장우가 사과하지 않자 김재연은 이튿날 이장우에 대한 징계안을 국회에 제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4&aid=0002562076</ref>
         {{선거기록/KR/개인|[[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총선]]|20대|국회의원|[[의정부시의 국회의원|경기 의정부시 을]]| 민중연합당 | 3,810표| 3.76 |4위|[[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의정부시 을|낙선]]}}
  • 이상백 (1904년) . . . . 7회 일치
         [[1946년]]에는 조선체육회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48년]] [[10월]] 잡지 학풍(學風)이 창간되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ref>정진숙, 《출판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180페이지</ref> [[1948년]]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었을 때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대한체육회 설립 이후 [[1951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을 거쳐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작가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내무부]]의 고등고시 출제위원으로 국사, 문학 분야의 출제를 담당하였고, [[중앙공무원훈련원]] 고문 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대한민국 학술원]]이 출범하자 학술원 회원으로도 초빙되었다.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연경학회(燕京學會) 회원, 동방문화 연구소 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64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 종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대회 선수단장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바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고, [[1966년]] 8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추서받았으며, [[1970년]] 12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국민훈장(國民勳章, Order of Civil Merit)|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 칼리파 하프타르 . . . . 7회 일치
         2014년 2월, 하프타르는 TV를 통하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반 국민회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라고 선언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의회 의사당을 장갑차와 로켓포로 공격하여 의회 권한 정지를 선언했으며, 국민군은 벵가지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안사르 알 샤리아' 등 이슬람계 세력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사실상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리비아 국민군에는 세속주의 반군 세력이 모두 결집하게 된다. 2014년 6월 국민투표(유권자 중 18%, 약 63만 명 투표)를 거쳐 동부지역에서는 대표자 정부(the House of Representatives)가 2014년 8월 4일 창립되어 일반 국민회의를 대체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군(the Libyan National Army)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 리비아 국민합의 정부와의 충돌 ===
         2015년 12월에, UN의 증재로 동부와 서부의 일부 세력이 합의하여 국민합의 정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동부지역은 반대파가 많이 합의가 승인되지 못하고 있다. 하프타르의 지지자들은 국민합의 정부에 대하여 하프타르의 지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리비아 국군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있다. 국민합의 정부는 동부지역 군 사령관 가운데 한 명인 마흐디 이브라힘 알 바르가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하프타르를 소외시키는 중.
         2016년 3월 30일, 임명된지 무려 3개월이나 지나서 국민합의 정부의 총리 세라즈가 튀니지에서 해로로 트리폴리에 들어왔으며 해군기지에 머물고 있다. 세라즈는 리비아 내에서 정치, 군사 지지 기반이 거의 없어, 트리폴리 정부 역시 세라즈의 입성을 반대하면서 공항을 폐쇄할 정도였기 때문.
  • Victoria II/정당 . . . . 6회 일치
          상징색은 노랑색. 정치적 개혁은 항상 지지하지만 POP의 투쟁성이 높을 경우에만 사회적 개혁을 지지한다. 투쟁성이 낮을 경우 무정부 자유주의자와 연대한다. 게임 내에서는 [[흥선 대원군]] 정권이 이 성향으로 등장한다.
          * 무정부 자유주의자(Anarcho Liberal)
          정부의 통제 없는 자유시장 지지. 플레이어는 산업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는 자유시장이지만 필요하다면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체제를 지지한다. 플레이어는 공장을 건설하거나 철거할 수 없다.
          정부가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해 모든 결정권을 가지길 원한다. 자본가 POP는 국내 산업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부가 군대를 강하게 지원하길 바란다. 국방예산을 최대치까지 배정할 수 있으며, 부대의 보충 속도와 조직력 회복 속도가 25% 증가한다. 전쟁 명문을 조작하는 속도가 20% 증가한다. 또한 동원령을 내렸을 시 일반적으로 모집 가능한 양의 3배의 병력을 징집하게 된다.
  • 김윤환 . . . . 6회 일치
         고등학교 동창인 노태우의 권유로[* 사석에선 [[전두환]], [[노태우]]와 서로 반말하면서 술 마시는 사이라고 한다.] [[민주정의당]] 창당 멤버로 들어갔다.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 [[청와대]]와 집권당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정치권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한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윤환은 당대의 '''[[킹 메이커]]'''(King Maker)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舊민정당(군사독재정권)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서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서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 메탈슬러그 시리즈 . . . . 6회 일치
          풀네임은 마르쿠리우스 데니스 롯시. 미국 아이다호 주 출신으로 정부군 소령이다. 본래는 온화한 성격이지만 로널드 모덴 원수를 떠올리면 목숨을 잃은 친구들과 전우들이 떠올라 분노를 이기지 못한다고. 컴퓨터 과학이 취미로 장난삼아 만든 바이러스가 군대의 중앙컴퓨터 시스템에 침입, 핵미사일을 발사시킬뻔한 전적이 있다.
          풀네임은 타미클 로빙 3세. 일본 홋카이도 출신으로 정부군 대위이다. 아버지는 우수한 군인이었으며, 타마 또한 중학교 졸업 즉시 군대에 들어갔다. 20대에 대통령을 구했으며, 군대에서 사귄 친구인 마르코와 함께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았다. 메탈슬러그 이후 은퇴해 바이크샵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던 상부의 요청으로 연기되었다.
          풀네임은 피올리나 제르미.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정부군 상사이다. 장남이 군인이 되는게 전통이었던 제르미 가문의 외동딸로, 어머니가 피오를 낳고 더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기에 군인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사랑받으며 지냈기에 점잖은 성격. 대학에서 척추 지압법, 침술, 뜸질을 공부받았으며 스포츠 닥터가 되는게 꿈이다.
          일본 히로시마 출신으로 정부군 소위이다. 어렸을 때 교회 계단에 버려졌으며 성장한 후 교회에서 도망쳐 부랑아의 리더가 되었다. 이후 그녀의 전투기술을 눈여겨본 정부군에게 영입, 1등급 공작원으로 수많은 임무를 성공했다. 이후 암살같은 임무나 양심에 걸리는 계획에 싫증을 느껴 특수분대 S.P.A.R.R.O.W.S.로 전속하였다.
          * 정부
  • 박세직 . . . . 6회 일치
         ||<#000080><-7><:> [[노태우 정부|{{{#FFFFFF ''' 노태우 정부 (1988 ~ 1993) ''' }}}]] ||
         1980년 보병 제3사단 사단장을 역임하다가 그 해 8월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예편하여 대통령이 되고 제8대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자 노태우의 뒤를 이어 제9대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냈다. 이 때까지는 잘 나가는 듯 하였다.
  • 성재기 (활동가) . . . . 6회 일치
         [[2013년]] 투신 직전 그는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는 정부에 문의해봤지만 일반 시민단체와는 달리 여성단체들처럼 [[여성가족부]]의 관할이라 했고, 그는 [[여성가족부]]의 지원은 거부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8&aid=0003089755 성재기 투신…여성부 한해 예산 얼마길래?] 머니투데이 2013.07.26</ref> 후원금으로만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를 운영하면서 '싱글대디 반찬배달', '무료 법률지원 서비스' 등 돈 드는 사업을 이어 가다 보니 재정난에 부닥쳤다.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는 [[2011년]] [[3월]]부터 [[2013년]] [[5월]]까지 각종 행사 비용 등으로 2억 4670만 원을 썼다. 하지만 후원금 수입은 1956만 원에 불과했다.<ref name="dongki">[http://news.donga.com/3/all/20130729/56716534/1 <nowiki>[기자의 눈/조동주]</nowiki> 男權을 대변한다며 몸던진 비극] 동아일보 2013.07.29</ref>
         [[2007년]] [[12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한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여성부]] 폐지를 강력 촉구하였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당시 [[여성부]] 폐지 운동을 벌였다.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여성부|여성부]] 폐지를 촉구하는 글을 올린 뒤, 계속해서 여성부 폐지를 촉구하는 글을 올렸으며 [[서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여성부|여성부]] 폐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남녀 평등이 상당부분 진행된 상태에서 남성들은 [[대한민국의 병역 제도|군 복무]]를 하느라 제약을 받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는 점, 일부 [[병역]] 미필자와 면제자들이 [[군 가산점|군필자 보상]]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점을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까지 여성부 폐지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였으며,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여성부를 폐지해줄 것을 촉구하는 서한과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군 가산점]] 외에도 [[병역]] 보상 방안을 반대하는 세력과 네티즌에 대해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라며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남성들의 병역 복무로 인한 손실보상 방안을 마련할 것을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에 촉구하였다. [[2011년]] [[6월 11일]] 케이블채널 리얼TV의 '리얼리티 시사 인터뷰쇼'는 10일 오전 9시 30분 '[[군 가산점]]제는 정당한 보상인가?' 편에 출연하여 [[군 가산점]] 부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제대 군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5105043 리얼TV '시사인터뷰쇼', 군가산점제 논란] 연합뉴스 2011.06.09</ref> 또한 군 가산점, 각종 군필자 보상을 반대하는 네티즌들과 블로그와 트위터 등을 통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의 [[성매매]]여성 보호 대책을 비꼬는 '가짜' [[캠페인]]은 논란이 되었다.<ref name="daedae"/> 문의 전화가 속출하자 그는 풍자 퍼포먼스임을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여가부 관계자는 "여가부에서 성매매 여성에게 현금 41만원을 입금해주는 내용의 정책은 단 한번도 시행한 바 없다"며 "남성연대가 풍자한 여가부의 '화이트타이' 캠페인에도 현금 지급을 언급한 내용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성재기는 [[성매매]]에 대한 탄압도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그릇된 풍조의 일종이라 지적했다.
         성재기는 [[2012년]] [[1월]]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 적이 없는데도 부처 명칭에 '[[가족]]'을 사용했다"며 [[여성가족부]] 명칭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으나<ref name="namgist">[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8/h2012082220593621950.htm 법원 "여성가족부 '가족' 명칭 문제없다"] 한국일보 2012.08.22</ref>, [[2012년]] [[8월 10일]] [[서울중앙지법]]은 이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였다.<ref name="minsis">[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serial=66490 "여성가족부에서 '가족' 빼라" 남성연대 신청 기각] 법률신문 2013.08.22</ref>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여성가족부]]가 '가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가족에 관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부조직법에 따른 것으로,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개정이 있어야 한다"라며 "[[남성연대]]가 여성가족부에 대해 '가족'이라는 명칭의 사용금지를 구할 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ref name="minsis"/>.
         [[2013년]] [[1월]]에는 정부 주도로 관공서에서 여성기업제품 구매의무화 하는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2013년 2월 10일부터 대림미술관 화장실문 부착광고를 시정 요청하여 2월 20일 성사시켰다.
  • 송언석 . . . . 6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0대 국회의원[br]기획재정부 제2차관[br]기획재정부 예산실 실장[br]자유한국당 경상북도 김천시 당협위원장[br]국민대학교 특임교수[br]제29회 행정고시합격 ||
         제29회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박근혜 정부]] 때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실 실장, 제2[[차관]]을 지냈다.
         계파는 [[친홍]]계로 분류된다.[* 송언석 의원이 [[박근혜정부]] 시절에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친박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송언석 의원은 [[배현진]], [[길환영]]과 같이 [[홍준표]]에 의해 자유한국당에 영입되면서 친홍 인사로 분류된다.]
  • 윤휘 . . . . 6회 일치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찬성]] 등을 지냈다. 사후 아들 [[윤면지]]의 공로로 [[의정부]][[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윤두수]]의 셋째 아들이다. [[윤흔]]의 동생이며 [[윤훤]]의 형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했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 또는 천상(川上),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윤휘는 [[1577년]](선조 11년) [[의정부]][[영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으로 [[증직|증]] [[좌찬성]]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윤변]](尹忭)이다. [[윤근수]]는 그의 숙부였고, [[윤방]], [[윤흔]]은 그의 형이며, [[윤훤]]은 그의 동생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9년]] [[의정부]][[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640년]] 원접사가 되어 [[청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였고, [[1641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공조판서]]로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642년]] [[지의금부사]],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 《장주집》이 있다. [[1644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죽은 뒤 아들 [[윤면지]](尹勉之)의 공훈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 이중환(법조인) . . . . 6회 일치
         || [[대한민국 정부|정부]] 관계자 ||<#ddd> [[청와대]] || __[[안종범]]__ · [[현기환]] · [[김한수(정치인)|김한수]][br] [[김상률]] · [[조원동]] [br] [[윤전추]] · [[이영선]] · ^^故^^[[김영한(공무원)|김영한]] ||<#ddd> [[대한민국 정부|행정부]] || __[[황교안]]__ · __[[문형표]]__ · [[김종덕]] · __[[조윤선]]__[br]__[[김종]]__ · [[송성각]] · ''[[유진룡]]'' · ''[[여명숙]]'' ||
         ||<#ddd><-2> [[이화여자대학교 정유라 특혜 논란|이화여대 입시부정 및 특혜]] || [[김장자]] · __[[최경희]]__ · __[[김경숙(1955)|김경숙]]__[br][[남궁곤]] · [[이인화|류철균]] · [[이인성(교수)|이인성]] ||<#ddd>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br]블랙리스트]] || __[[김기춘]]__ · __[[조윤선]]__ · [[김희범]] · [[김소영(정치인)|김소영]][br][[정관주]] · [[신동철]] · [[모철민]] · [[송광용]] ||
         ||<-6> [[박근혜정부]] · [[새누리당]] · [[친박]] · [[미르재단]] · [[K스포츠재단]] · [[더블루K]] · [[비덱]] ·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 [[팔선녀(단체)|팔선녀]]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 [[삼성그룹/비판 및 문제점#s-10|삼성그룹]]([[삼성전자 승마단]]) · [[국민연금공단]] · [[이화여자대학교/사건사고|이화여자대학교]] · [[영세교]] · [[알자회]] · [[고령향우회]] · [[통일교]] · [[일베저장소]] · [[대한민국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 · [[대한민국 엄마 부대|엄마부대]] · [[박사모]] · [[아프리카TV/사건사고#s-1.10|아프리카 TV]] · [[주식갤러리#s-2.5|주식갤러리]] · [[JTBC]] · [[회오리축구단]] · [[워마드]] ||
  • 이철희(1964) . . . . 6회 일치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에서 정책 행정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고, [[노무현]] 대선 캠프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김한길(정치인)|김한길]] 의원의 보좌관으로도 일했는데, 언제부터 일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2000년대 중반에는 확실히 의원 보좌관이었다. 2008년 전후로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는데, 정작 이후에도 대학 출강을 한다든지, 여론조사 기관에서 일한다든지, 민주당 당내 정책연구소에서 부원장을 지낸다든지,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정치 스펙을 쌓았다. 본인의 말로는 2012년 [[19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도전했으나 끝내 공천되지 못했다. 열심히 스펙을 쌓았지만 [[http://m.news1.kr/news/category/?detail&593920|서류심사에서 탈락해서]] 면접도 못 봤다. [[http://mnews.joins.com/article/7703750|공천 과정에 대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들의 코멘트]]] 2016년 기준으로 보면 전화위복이지만, 그 과정에서 시사평론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호감에 쐐기를 꽂아버리는 발언이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http://gosunggo.com/693|박영선 의원과의 녹취록 논란]]이고, 두 번째는 [[유시민]] 씨가 인터넷 방송을 통해 밝힌 [[http://m.hani.co.kr/arti/politics/assembly/735001.html|'특정 지인을 지역구에 꽂아주기 위해 인원을 컷오프했다. 그 배경에 박영선, 이철희가 있다']] 라는 내용.[* 유시민 작가는 불만이 있으면 자신에게 소송을 걸라며 당당하게 주장을 하긴 하였으나 민주당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인지라 더민주 내부 상황을 얼마나 잘 아는지 의문스럽고 또 정황 증거만 제시할 뿐 확실한 상황 증거는 내놓은 게 없다. 게다가 공개적인 토론 장소에서도 '새누리당 다음으로 싫어하는 정당이 더민주'라고 할 정도인 데다, 그때 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정의당과의 당 대 당 야권 연대 방침을 철회하면서 정의당으로서는 지역구에서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해당 발언의 사실성을 떠나서 민주당을 떠난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친분이 있는 인사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 의원과도 친분이 있었다. 특히 소위 친노 인사들과는 당연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민주당 내 주류가 친노라는 점에서 유시민 씨가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모를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러한 장대한 논란 거리를 만들어내다보니 [[박영선]], [[이종걸]] 의원과 함께 당내의 어그로 지분을 확보했다.
         이후 국방위 소속 의원으로 MB 정부 시절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개입 문건을 결제한 사실을 공개하는 등 여당의 공격수로 군 내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파해 치며 정력적으로 의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KEPD 350]] 도입이나 [[중고 치누크 도입 논란]]을 지적했는데 잘못 짚으면서 이미지를 좀 까먹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같은 당 출신인 [[김광진(정치인)|김광진]] 전 의원이 반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는 현 정부와 여당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이렇게 봐요.||
         어떤 불리한 주장들도 다 정부나 여당으로 책임을 돌리는 논법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적절히 바꾼 말들이 페이스북 등지에서 유행을 하고 있다. 다만 집권여당의 전신들 같은 경우엔 이철희가 하지 않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냥 '한나라당 아닙니까' 이런 건 있다--
  • 정종원 . . . . 6회 일치
         정부가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의 주식을 모두 거둬들이면서 주요 은행의 지배주주는 정부가 차지하게 됐다. [[관치금융]]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부는 1960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금융산업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금공급은 은행 자율보다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정종원 행장이 5.16쿠데타 직전 은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ref>경향신문 1965년 3월 11일 시은경영태세 대전환 필요</ref><ref>매일경제 1970년 11월 3일 3면 금융은 정상화될까</ref><ref>매일경제 1979년 5월 1일 1면 관치에 밀리는 자율화</ref>
  • 창작:IDF . . . . 6회 일치
         IDF는 언제나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가만을 회원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이사국의 승인에 따라서 임시 정부나 잠정 정부, 특정 정치 집단 대해서도 회원국 자격이나 총회이 발언권은 있으나 표결권은 없는 옵저버 자격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파병을 요청하는 국가 측에서는, 비록 IDF 역시 강대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친다고는 하나 국제기구라는 틀을 가지고 있으므로 직접적으로 외국 정부와 외국 군대의 개입을 직접 요청하는 것보다 해당국 정부에서 정치적 부담을 적게 느끼게 된다. 강대국처럼 점령을 바탕으로 내정에 간섭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IDF는 국제기구라는 특성상, 자국 군대와는 달리 쿠데타를 벌이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어 신뢰받는 전력으로 여겨진다. '국제기구'라는 특성상 IDF가 특정 국가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소국에서는 자국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점령 등을 당했을 때의 대비책으로 IDF에 가맹하고 있으며, 군사정권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한 몇몇 정부에서는 기존에 독재 정권과 협력하거나 군정을 하던 군부에 대한 경계 의식이 강한 탓에 IDF에 가맹하는 경우도 있다. 내전을 겪었던 나라나, 침략을 받았던 나라에서도 치안유지 병력확보나 보다 나은 안전 보장을 위하여 가맹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측면에서 IDF는 여러 나라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IDF의 가맹으로 메겨지는 분담금은 실제로 각 국이 자국의 주도로 '쓸만한 군대'를 IDF와 같은 규모로 키우는 비용과 기간을 고려하면 IDF 가맹은 싸고 간편하게 적절한 군사력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IDF는 비교적 저렴한 군사비로 비상시에 "훈련도가 높은 군대"에게 확실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각 국 정부 입장에서는 비교적 경제적인 '군사 보험'으로 여겨지는 셈이다.
  • 한확 . . . . 6회 일치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간이재 한확은 [[1400년]](정종 2년) 녹사를 지내고 [[증직|증]] [[병조판서]]에 추증된 [[한녕]](韓寧)의 손자이며,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를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서성부원군에 추증된 [[한영정]](韓永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는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되었고, 그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452년]](문종 2년) 초에 귀국, 그해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권람]], [[정인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사돈 [[조선 세조|수양대군]](首陽大君)의 즉위를 도왔으며 [[명나라]]에 있는 누이 [[공신부인]]과 죽은 [[여비 한씨]]의 후광에 힘입어 이들의 거사를 은밀히 지원하였다.
         [[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그해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초 다시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을 순찰하고 되돌아온 뒤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원년)에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 현정건 . . . . 6회 일치
          | 직책 = 前 [[대한민국 임시 정부|대한 임정]] 예하 의정원 경상도 의원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 김현철(교수) . . . . 5회 일치
         [[대한민국]]의 정무직공무원.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이다.
         이후, [[문재인 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에 임명되었다.
         2015년 11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최고위 경제분석과정 강의에서 “수출 부진과 가계부채 증가로 한국 경제는 파국에 접어들고 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경제]]가 1990년대 중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일본경제와 닮았다고 평가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니가 삼성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소니는 삼성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무너뜨린 것"[* 소니가 안 무너졌다는 반론은 있다. 오히려 반등에 성공했다는 지표도 있다. [[http://it.chosun.com/news/article.html?no=2819018|링크참조]] 그러나 맥락상 포인트는 소니가 무너졌다 안무너졌다의 단순 팩트 체크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법인세율 인상 정책 때문에 소니가 피해를 입었다는 맥락이다.]이라며, 법인세율 인상은 기업을 망가뜨리게 되고 나아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 [[분류:교수]][[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1962년 출생]][[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시계태엽 오렌지(영화) . . . . 5회 일치
          반정부적인 성항을 가진 작가와 그 아내. 집에 쳐들어온 알렉스 일당에게 남편이 구타당해 쓰러지고 아내는 윤간당한다. 이로인해 아내는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남편은 보호자가 필요한 몸이 되었다.
         알렉스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떤 집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과거에 구타하고 윤간했던 작가 부부의 집이었다. 반정부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작가, 알렉산더는 알렉스에게 루드비코 요법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이를 받아 적는다. 하지만 알렉스가 목욕하면서 부르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듣고 그가 자신의 아내를 강간해 죽이고 자신을 반신불수로 만든 자인걸 깨닫는다. 알렉스가 그의 아내를 강간할 때 "사랑은 비를 타고"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 일은 크나큰 파장을 불러온다. 정부는 혼수상태에 빠진 알렉스의 루드비코 요법을 치료한다. 그러고는 깨어난 알렉스에게 정부의 편을 들 것을 권하며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는 오디오를 선물한다. 기자들이 병실로 몰려들어와 정부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는 알렉스의 사진을 찍는 와중, 알렉스는 섹스를 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자신은 치유되었다고 독백한다.
  • 원피스/867화 . . . . 5회 일치
          * 그녀는 세계정부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정부에 우수한 자질의 고아들을 팔아넘기고 있었다. CP 요원들 대부분은 그녀가 공급한 고아들.
          * 거인족을 감동시킨 사건도 모두 연기에 지나지 않았고 처음부터 거인족 병사를 세계정부에 팔아넘기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 결과물이 존 자이언트.
          이것이 카르멜의 진짜 정체. 그녀의 진짜 얼굴은 "고아판매상"이며 뒷세계에서는 "야만바"(산 속 마귀할멈)이라 불리는 극악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상대하는 인물은 세계정부의 하수인이며 양의 집을 통해 2년에 한 번씩 고아를 공급 받아 CP의 요원으로 쓰고 있었다. 37년 전 카르멜이 거병 해적단 잔당을 구한 것도 연극. 처음부터 해군과 그녀는 한패였으며 엘바프 섬에 그녀를 잠입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목적은 거인족의 아이를 꾀어내 해군에 "납품"하기 위해서였으며 해군 최초의 거인 해병 "존 자이언트" 또한 그녀의 "유통라인"에서 나온 성과였다.
          *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간다.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아이들만큼 천진난만한 것도 없다. 아이들이 "빙크스의 술"을 부르며 해적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카르멜은 "너희는 전부 정부에 팔린다"고 속으로 코웃음친다.
  • 윤흔 . . . . 5회 일치
         [[병자호란]] 때에는 [[후금]]과의 협상을 강력 반대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는 [[1632년]] [[인목대비]]와 [[1635년]] [[인열왕후]]의 [[국상]] 장례를 주관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인조 14년) [[정묘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 [[김상헌]]과 함께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사후 [[병자]], [[정묘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웅렬]](尹雄烈), [[윤영렬]](尹英烈) 형제는 그의 7대손, [[윤치호]]는 그의 8대손이다. [[이이]]·[[성혼]]·[[정철]]의 문인이다.
         도재 윤흔은 [[1564년]] [[조선 선조|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윤희림의 증손으로, [[조선 인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방]](尹昉)의 동생이다.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윤훤]], 윤휘(尹暉)의 형이고, [[조선 선조|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백부였다.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월정 [[윤근수]]는 그의 삼촌이었다. 처음 이름은 양(暘)이었는데 뒤에 흔으로 개명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윤두수]]의 묘소 옆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호종 공로로 사후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관상감사]]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 이장우 (1871년) . . . . 5회 일치
         [[1926년]] [[9월 4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3년]] 11월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을 지냈으며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대구지부 부지부장(1933년), 조선농회 통상의원(1934년, 1938년 5월 18일), 경상북도농회 부회장(1934년 4월 20일, 1938년 4월 13일), 경북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1936년 11월 18일), 조선나예방협회 평의원(1938년)을 역임했다. [[1941년]]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 [[8월 3일]]부터 [[1944년]] [[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3년]] 3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에 기금 6,000원을 기부했으며 [[1933년]] [[10월 19일]]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936년]] 5월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조선지방본부 무덕전(武德殿) 건축비 10,000원을 기부했고 [[1937년]] [[1월 26일]]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紺綏褒章)을 받았다. [[1927년]] 3월 당시 경상북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비 4,816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 [[8월 4일]] 일본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분류:1871년 태어남]][[분류:1944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창원시 . . . . 5회 일치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인센티브를 거론하며 기초자치단체 간 통합을 유도하였으며, 당연히 그전부터 경제/사회/문화적 교류가 많은 소위 마창진([[마산]], [[창원시/통합 이전|창원]], [[진해]])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3개 시는 지난한 정치적 협상 및 행정적 조율을 거쳐 드디어 2010년 7월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경상남도의 창원시, 마산시 및 진해시를 각각 폐지한다."(경상남도 창원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경상남도에 창원시를 다음과 같이 설치한다."(같은 조 제2항. 제1항에 따라 폐지되는 창원시 일원, 마산시 일원 및 진해시 일원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창원시 설치)] 이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수립 이후 첫 번째 사례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함안군]]도 포함될 뻔했으나 제외되었다.[* 마산과 함안이 밀었던 모델은 함안+마산+창원 이였고 창원이 밀었던 모델이 마산 + 창원+ 진해 였다. 마산은 이 3도시가 통합되면 마산은 발전동력이 다해 쇠퇴하던 도시가 다시 도시중심부가 되어 새로운 발전동력을 얻을수 있었고 함안은 새로이 공장이 들어서는 발전가능성이 높은 도시였으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탓에 과감한 투자를 할수 없으므로 많은 재정을 유치할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창원시는 아직도 북면의 개발등 개발지역이 남아있고 함안과의 연동으로는 별 메리트를 찾을수 없었던 터라 함안과 마산을 제외하고 신항이 들어서던 진해와 합쳐서 항만도시로의 발전을 추구하는게 낫다고 판단하고 도시통합을 추진했다.]
         반면 뚜렷한 지역성과는 반대로, '''각 지역간을 오가는 교류는 굉장히 활발하게 이어져왔다.''' 마산, 창원, 진해의 3개 도시가 '마창진'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동일한 생활권으로 인식되어 온 주된 이유. 이들 3개 지역에 [[시내버스]]가 통합 운행을 시작한 건 '''[[1977년]]'''의 일이었고([[창원시내버스협의회|마창시내버스협의회]]의 출범과 함께), 창원의 대규모 계획도시가 1970년대부터 조성에 들어갔음에도 마산의 창동, 오동동 상권이 1990년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창원공단에서 근무하던 직장인이 퇴근 후 마산으로 넘어와 주류를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지역번호를 누르면 칼같이 시외전화 요금을 받던 시절[* 서울-성남/안양/구리/의정부/고양, 창원-진해도 당연히 시외요금이었다. 시내요금권역은 서울-과천·광명, 인천-부천, 대구-경산, 대전-두계(계룡) 등 정말 몇 안 되었고 거의 대부분 정책적 위성도시였다. '''[[분당신도시]]의 서울전화 편입 논란'''도 있었을 정도로 시외전화라는 것에 민감하던 시절이었음을 상기하자.]에도 마산/창원은 0551로 동일하였고 시내요금으로 통화가 가능했다.[* 이 당시 시외전화라 그러면 10원짜리가 쭉쭉 떨어져 100원짜리를 2개는 준비해야 제대로 통화를 했던 시절이다. 시내요금은 20~50원으로 3분간 통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상남동(창원 성산)|상남동]]의 상권 개발 이후로는 오히려 마산 지역 사람들이 공단에서 퇴근하고 근처 상남동에 가서 술을 마신 뒤 마산으로 돌아가는(...) 문화가 정착했다. 역사적으로도 창원과 마산은 1300년대에 의창현[* 현 창원시 의창구]와 회원현[* 현 마산시 회원구]이 합쳐서 만들어진 창원도호부가 그 시작이 된 도시로 왜정시절 일제의 필요에 의해 마산이 새로이 탄생한 이전까지는 같은 도시였다.
         여튼 현재 창원의 경제적 규모는 광역시급이며, 통합시 출범을 토대로 광역시 승격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창원시가 경상남도에서 빠져나간다면 경제적 타격이 크기 때문에 경남은 창원이 독립하고자 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역 균형발전 정책상 수원과 더불어 광역시 승격은 매우 힘들다. 다만 통합으로 인한 혜택을 몇 가지 받기는 했지만 역시나 시 규모에 걸맞는 권한을 못 가졌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비슷한 처지인 [[수원시|수원]], [[성남시|성남]], [[고양시|고양]] 등과 더불어 새로운 자치단체 규정을 만들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는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할 듯. 최근 여러번의 선거를 거치며 광역시로 승격하자는 슬로건과 플래카드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긴 한데, 이미 언급했듯 가능성은 크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창원광역시]] 참고.
         경제 규모로는 이미 [[광역시]]급이다. 덕분에 [[경상남도]]는 [[부산광역시|부산]]에 이어 [[울산광역시|울산]]을 뱉어내고도 지역총생산이 '''광역자체단체 3위'''이다. 두산([[두산인프라코어]], [[두산중공업]]), LG([[LG전자]]), 한화([[한화기계]],[[한화테크윈]][* 구 삼성테크윈]), 현대차그룹([[현대위아]],[[현대로템]]) 등 많은 재벌기업들이 창원에 [[공장]]을 갖고 있다. 심지어는 정부, 정확히는 대한민국 육군에서도 [[종합정비창|초대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창원시/경제]] 항목 참조.
  • 채동욱 . . . . 5회 일치
         [[2013년 4월]]부터 [[2013년 9월|9월]] 초 39대 검찰총장 재임기간 중 제13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노태우]]의 미납추징금을 완납받고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는 완납 계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2013년]] [[9월 6일]] 혼외자식이 있다는 의혹을 [[조선일보]]가 제기하자 법무부 장관 [[황교안]]이 감찰을 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는 [[9월 30일]]에 사표를 수리하였다.
         * 1988년 :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 검사
         * 1995년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수사에 참여. 12·12 사건과 5·18 사건의 검찰논고를 작성.
         * 2000년 : 의정부지청 형사5부장<ref name="junbo"/>
         * 9월 4일 : 노태우 전 대통령 미납추징금 완납
  • 최호중 . . . . 5회 일치
         '''최호중'''(崔浩中<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4250009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4-25&officeId=00009&pageNo=2&printNo=5582&publishType=00020 經濟에 밝은 직업外交官 崔浩中] - 매일경제, 1984년 4월 2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500329204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2-05&officeId=00032&pageNo=4&printNo=13292&publishType=00020 崔浩中 외무장관 外務部서 잔뼈굵은 正統派] - 경향신문, 1988년 12월 5일</ref>, [[1930년]] [[9월 22일]] ~ [[2015년]] [[2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전 외무공무원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북방외교]]의 한 주역이자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시에도 역할을 했다.
         * 노태우 정권 당시 북방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북방(北方) 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벨기에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말레이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최씨]]
  • 폐비 윤씨 . . . . 5회 일치
         바로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고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어머니는 각각 정경부인 [[양성 이씨]](貞敬夫人 陽城 李氏)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長興府夫人 高靈 申氏)로 추숭되었다.
         * 조모 : 정부인 [[안동 권씨]] (貞夫人 安東 權氏, 생몰년 미상)
         * 외조모 : 정부인 [[장흥 마씨]] (貞夫人 長興 馬氏, 생몰년 미상)<ref>장흥부원군 충정공 [[마천목]](長興府院君 忠靖公 馬天牧)의 딸</ref>
         ** 어머니 : 정부인 [[고령 신씨]] (貞夫人 高靈 申氏, 생몰년 미상)
         *** 올케 : 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 생몰년 미상)
  • 한규복 (1881년) . . . . 5회 일치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02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본]]의 [[유도]]도장인 [[강도관]](講道館)에 다녔다. 공승화전개(일본 工勝花雷介)의 《비록일본유도(秘錄日本柔道)》의 기사와 일본강도관에 조회한 바에 의하면 [[1902년]] 한규복 등이 [[강도관]]에 입문하여 [[유도]]를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김정행, 《무도론》 (대한미디어, 1997) 129페이지</ref> 그는 [[1902년]] [[8월]]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한다.<ref>이학래, 《한국유도발달사》 (보경문화사, 1989) 37페이지</ref> 일본의 유도 전승에 자극받은 그는 귀국 후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상소를 올려 [[택견]] 관련 인물과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상주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
         [[분류:1881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사상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 함인섭 . . . . 5회 일치
         === 정부 수립 이후 ===
         [[1948년]] [[8월]]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現 강원대학교) 설립,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학장서리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문교부]] 국가고등고시 전형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9년]] [[8월 30일]]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건국 이후 그의 할아버지 [[함태영]]이 조선 말 [[독립협회]]사건과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수감된 [[이승만]]에게 관대한 한결을 내려 그 인연으로, 내각 법무장관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고 할아버지 [[함태영]]은 [[심계원]]장과 제3대 [[부통령]]을 지냈다. 전쟁이 발생하자 그의 동생 함의섭이 일가족을 이끌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신하였다.
         [[1952년]] [[3월 6일]] 제6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이 되자 그는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한 [[토지개혁]] 당시 농지보상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8·15 광복 직후에 발생한 토지관련 분쟁과 토지보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 [[8월 28일]], 1952년의 중석불 사건으로 인책 사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1020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947&publishType=00020 ]</ref>하였다. 그는 중석불 사건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20009910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3-22&officeId=00009&pageNo=9&printNo=9047&publishType=00010 ]</ref> 그밖에 그는 강원도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강원도 교육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9120032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9-12&officeId=00032&pageNo=1&printNo=3366&publishType=00020 ]</ref>이 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고 1957년 5월 12일부터 [[1960년]] [[7월 7일]]까지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는 또 [[1960년]] [[7월 5일]]까지 고등고시 전형위원에도 위촉되었다.
         본처 유순희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선영 내에 있다. 할아버지 [[함태영]]의 묘소는 후일 동작동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함태영]][[분류:이승만]][[분류:강원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상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중동고등학교 동문]][[분류:강원대학교]][[분류:도쿄 농업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함씨]][[분류:자유 연애]][[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FN 에르스탈 . . . . 4회 일치
         1889년 [[벨기에]] 정부가 [[마우저]] 소총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한 Fabrique Nationale d’Armes de Guerre(국립전쟁무기공장)이 시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벨기에 정부는 FN을 독일인들에게서 몰수, 벨기에 기업에 팔아넘긴다. 이때 쯤 FN은 총기와 자전거 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오토바이]]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30년대 대공황이 닥치며 자동차 사업은 군용차만 생산하는걸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자 FN도 독일 정부에게 징발당한다. 이 때 경영진들이 제작공구를 빼돌리는 등의 저항을 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가 되어 독일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까 싶자마자 독일군의 로켓병기로 보복폭격을 맞았다.
  • USS 피닉스 (CL-46) . . . . 4회 일치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과 분쟁이 있던 [[포클랜드 제도]][* 아르헨티나측은 이 제도를 말비나스 제도(Las Malvinas)라고 부른다.]를 점령한다. 이에 영국이 군사적 대응을 시작하며 [[포클랜드 전쟁]]을 발발한다.
         영국 국방부는 벨그라노가 전쟁 구역인 포클랜드 반경 200 마일 내에 들어왔을 때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벨그라노가 격침 당할 당시 전쟁 구역에서 36 마일 떨어져 있었기에 벨그라노에 대한 공격 행위는 전쟁 범죄라고 주장했다.
         2012년 5월 2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헤네랄 벨그라노 침몰 30주년 행사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했다.
         영국의 ~~찌라시~~황색 언론 [[더 선]]은 헤네랄 벨그라노의 피격 사실을 전할때 1면 헤드라인에 "'''잡았다!''': 우리 친구들이 포함을 격침시키고 순양함을 구멍냄"[* GOTCHA!: Our lads sink gunboat and hole cruiser]라고 쓰는 패기를 보였다. 이외에도 더 선은 포클랜드 전쟁 동안 "'''뒈져라 군사정부놈들'''"[* STICK IT UP YOUR JUNTA] 등의 부적절한 헤드라인을 내걸기도 했다.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육군 . . . . 4회 일치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s-5.3|국가 & 정부]]''' 기술 연구시 '''{{{#green +1%}}}'''
          * '''Local Military Government(지방 군사 정부)'''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s-5.3|국가 & 정부]]''' 기술 연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s-5.3|국가 & 정부]]''' 기술 연구시 '''{{{#green +1%}}}'''
  • 국부펀드 . . . . 4회 일치
         국가의 자산을 불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수한 목적의 국영 펀드. 국부펀드는 주로 정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있으며, 외화(주로 달러)로 표시된 자산을 가지고 운용한다. 자금투자운용은 일반적인 투자펀드와 비슷하게 [[채권]], [[주식]], 부동산 등 전통적인 분야에서 자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다. 미국 텍사스 주, 오레곤 주의 주에서 보유한 펀드는 주정부 소유의 공유지 토지임대수익으로 펀드를 조성하기도 한다.
          * 노르웨이 정부연금펀드(GPFG) : 노르웨이. 세계 2위 규모.
          *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GIC) : 싱가포르.
  • 김기섭 (1939년) . . . . 4회 일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아남산업]]에서 근무하다가 삼성계열사로 이직, [[신라호텔]]과 삼성전관 등에서 이사, 상무, 전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김영삼]] [[민주자유당]]의 총재특보로 발탁되었으며, 대선 당시 총재특보와 이미지메이킹 등을 담당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후 [[안기부]]의 기조실장과 운영차장을 역임했다.
         *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녕 김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호텔 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영삼]][[분류:김영삼 정부]][[분류:대한민국의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 김대휘 . . . . 4회 일치
         |경력 = [[서울북부지방법원|서울북부지방법원장]]<br/>[[의정부지방법원|의정부지방법원장]]
         '''김대휘'''(金大彙, 1956년 ~)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춘천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법무법인 화우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법조인과 대학교수로 구성된 학술단체인 형사판례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춘천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 법관에서 퇴직하여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하면서 동국제강 사외이사와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였다. 2014년에 [[새누리당]] 경제혁신특위 규제개혁분과위원회 전문가위원에 지명되었으며 2014년부터 [[세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를 하였다.
  • 노재헌 . . . . 4회 일치
         |부모 = [[노태우]](부), [[김옥숙]](모)
         '''노재헌'''(盧載憲, [[1965년]] [[11월 3일]] ~ )은 [[노태우]] 前 대통령의 아들로 현재 [[법무법인 바른]]의 미국법자문사이다.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노태우 가계도}}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위]][[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강남대학교 교수]][[분류:수원대학교 교수]][[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경복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경영대학 동문]][[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노태우 가]][[분류:교하 노씨]]
  • 대한민국 망명정부 서사모아 설치계획 . . . . 4회 일치
         [[6.25 전쟁]] 때,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서사모아]]에 설치한다는 계획. 당시 사모아는 [[뉴질랜드]]의 신탁통치 하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제안했던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과는 달리, 미 국방부와 합참본부가 계획한 것이다.
         남한 정부와 60만 혹은 32만 8천명의 주민을 서사모아로 이주시켜서 새로운 한국(New Korea)를 건국한다는 계획이다.
  • 박동진 (1922년) . . . . 4회 일치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분류:1922년 태어남]][[분류:2013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국토통일원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최규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베트남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브라질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민주정의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밀양 박씨]]
  • 박승호(정치인) . . . . 4회 일치
         용인대학교 졸업 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1기 공채로 입사하여 [[노태우]] 조직위원장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1985년 [[민주정의당]] [[총재]]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가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 관선 [[봉화군]]수를 지냈다. 이후 내무부, 행정자치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 경상북도공무원교육원 [[원장]]을 지냈다.
  • 박홍우 . . . . 4회 일치
         대전고등법원으로 재직하던 2015년 2월 대전고등법원 제3행정부 재판장으로서 행정본안재판의 일부를 직접 맡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인 1995년 시위 진압과정에서 최루탄에 도망가다가 넘어져 질식사 사망한 성균관대 학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망인의 위자료를 5000만원 인정한 것과 2004년 [[세녹스]]의 석유사업법 위반 사건에서 1심에서의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유죄를 선고한 것을 들었다.<ref>[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1509100056]</ref>
         * [[2011년]] [[5월 25일]]~ [[2012년]] [[9월 4일]] 의정부지방법원 법원장
         * [[1999년]] ~ [[2000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부장판사
         * 정부불신임제도에 관한 입법론적 고찰 (1979) <ref>[http://www.kcllaw.com/prof/?no=667]</ref>
  • 박희광 . . . . 4회 일치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되어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등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김광추(金光秋), 김병현과 함께 3인조 암살단을 조직, 활동하였다.
         박희광은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통의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암살,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다코) , 이용구, 최정규 암살임무 등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 했었다.
         박희광은 1924년6월7일 상해임시정부(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날 저녁 대서관(大西關)에서 군자금을 탈취하고, 금정관(金井館)에서 다시 군자금 300엔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 경찰과 총격전끝에 현장에서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22년 가을 쯤 300엔이라는 돈의 가치를 추정한다면, 당시 찬거리로 5전(錢)을 내면 푸줏간에서 150g 정도의 작은 쇠고기 덩이를 주었다니까 600g 1근에 20전 정도. 지금의 쇠고기 값 횡성한우 1등급 국거리 600g기준 26,800원으로 잡으면 1전에 1,340원, 그 당시 환율로 100전은 1엔이니 300엔은 40,200,000원정도 추정된다. 당시, 권총 한자루를 구하는데 10개월이 걸렸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자금난을 고려한다면 군자금으로는 거금이라 할수 있겠다. (姜東鎭, ‘日帝의 韓國侵略政策史 –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394~395쪽)
  • 슈퍼걸(드라마)/1시즌 4화 . . . . 4회 일치
         알렉스는 맥스웰에게 테러를 경고하지만 맥스웰은 정부의 보호 따윈 필요없고 믿지 못한다며 멈추지 않는다. 카라는 제임스에게 루시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맥스웰의 부모는 정부에서 생화학무기에 대항하는 백신을 개발하고 있었으나, 시설의 순환기계의 고장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몸이 녹아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 이를 은폐하였고 맥스웰은 정부에 불신감을 가지게 된다.
  • 안종범 . . . . 4회 일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 분야 공약을 만들었다. 2014년 6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경제수석비서관]]에 지명되면서 의원직을 사직했다. 2016년 5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에 임용되어 일하다가 [[박근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대통령]]이 '[[최순실]] 비선 실세 파문'과 관련해 수석비서관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지시하면서 2016년 10월 30일 사임하였고 제3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강석훈]]이 그 직을 임시 대행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69333 靑 수석비서관들 일괄 사표제출…朴대통령 인적쇄신 가능할까]. 서울신문. 2016년 10월 30일.</ref>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23&aid=0003228904 민정수석·청와대 비서관… 도대체 뭐 하는 자린고?]. 조선일보. 2016년 11월 16일.</ref> <ref>이상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774512 靑 정책조정수석, 강석훈 경제수석이 대행]. 머니투데이. 2016년 11월 16일.</ref>
         * ~ 1996 . 09 :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조정부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순흥 안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박근혜 정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자]]
  • 오재희 . . . . 4회 일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주미·주일 공사, 주 파키스탄 대사,<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070009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3-11-07&officeId=00009&pageNo=1&printNo=5439&publishType=00020 | 제목 = 韓國, 파키스탄과 修交 | 날짜 = 1983-11-07 | 출판사 = 매일경제신문 | 인용문 = 政府는 7일 파키스탄 정부와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고 외무부가 발표했다. 外務部는 이날 발표에서 韓․파키스탄 국교수립으로 양국 주재 총영사관이 각각 대사관으로 승격되고 양국 주재 대사 임명에 앞선 잠정조치로서 吳在熙 駐파키스탄총영사와 자베드․마수드 駐韓파키스탄 총영사가 각각 대사대리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ref>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차관|외무부 차관]], 주일 대사를 역임하였다.
         1991년 2월 19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일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재희 대사의 기용은 그의 직업외교관 경력으로 미루어 자연스런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이고 [[노재봉]] 총리의 매형, [[이상옥]]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외무부 장관]]과는 대학 동기 사이라는 학연, 혈연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었다. 성격이 꼼꼼하고 일처리가 치밀하며 빈틈없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오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외무고시]] 출신으로 첫 주일 대사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21900329201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2-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3971&publishType=00020 | 제목 =大使7명 이동 | 날짜 = 1991-02-19 | 출판사 = 경향신문}}</ref>
  • 오중기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정치인.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경상북도에서만 10여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이다.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다 2018년 2월 경북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참여정부]]가 무차별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계기로 역사적 사명감을 느꼈다. 동서로 갈라진 지역주의 타파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여겼다. [[김근태]] 전 의장의 권유로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 정치에 투신한다.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중 균형발전비서관실의 선임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지역 도당위원장 정도를 선임행정관으로 임명하는건 격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균형발전비서관이 일찌감치 사직해 공석인 상황에서 2018년 2월 1일 선포된 국가균형발전 비전 수립을 이끌었다. 직후 사직하여 2018년 2월 5일, 경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재도전하기로 [[https://youtu.be/7R_kl03ESn8|선언]]했다.
          * 2017년: [[문재인정부]] [[청와대]] 균형발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 원피스/871화 . . . . 4회 일치
          * 루 펠드를 저격한 것은 환락가의 여왕 스튜시. 그녀의 진짜 정체는 스튜시의 진짜 정체는 세계정부의 첩보기관 "사이퍼 폴 이지스 제로"의 요원.
          * 세계정부는 당초부터 옥갑을 노리고 있었고 이 기회에 옥갑을 빼돌리고 그 혐의는 루 펠드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다.
          * 옥갑을 빼돌리려고 했던 루 펠드는 난감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성 밑으로 옥갑을 떨어뜨려 버린 것. 다행히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옥상 바로 밑의 넓은 지붕 부분. 그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루 펠드는 저걸 어찌해야 좋을까 고민한다. 뛰어내려야 좋을까? 그 고민은 환락가의 여왕 스튜시가 해결해준다. 그녀가 불쑥 튀어나오자 당황한 루 펠드가 중심을 잃고 난간 너머로 떨어진다. 그도 마침 지붕 부분으로, 딱 옥갑 앞에 떨어진다. 루 펠드가 잘 됐다치고 옥갑을 열어보려 하는데, 어디선가 저격이 날아온다. 탄환없는 총, "지건"이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스튜시. 그녀가 범인이다. 환락가의 여왕은 표면 상의 얼굴. 진짜 정체는 세계정부 첩보기관 "사이퍼 폴 이지스 제로"의 요원. "날으는 지건"이란 기술로 루 펠드를 조용히 처리했다. 그녀의 목적, 아니 세계정부의 목적도 옥갑이었다. 그녀는 옥갑을 빼돌리고 그 죄를 루펠드에게 뒤집어 씌울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 이상휘 . . . . 4회 일치
         [[이명박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명박정부]] [[청와대]] 춘추관장 ||
         [[2009년]] 3월에 [[이명박정부]]로부터 [[청와대]] 춘추관 관장 및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친이|친이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포항 북 지역구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친박계]]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2014년]]에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에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아 [[동작구 갑]]으로 출마했지만 국정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병기(정치인)|김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에는 [[이정현(정치인)|이정현]] 대표에 의해 새누리당 원외대변인으로 임명되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대변인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비박]]계 모임인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했다.
         [[2018년]] 1월에 [[이명박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을 수사 중에 [[검찰]]로부터 비공개 소환조사를 받았다.
  • 이원재(공무원) . . . . 4회 일치
         ||<#C01920><-2><:> {{{#FFFFFF ''' 박근혜 정부 (2013 ~ 2017) ''' }}}]] ||<#1870B9><-3><:> {{{#FFFFFF ''' 문재인 정부 (2017 ~ 2022) ''' }}} ||
         문재인 정부의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청장이다.
         [[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문재인 정부/인사]]
  • 이정호 (독립운동가) . . . . 4회 일치
         1942년 10월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장, 1944년 정보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 4월에는 선전부에서 선전위원으로 일하였다.
         1944년 6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으로 주중 미국대사관에 특파되어 일본군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군내 한국인의 이탈을 선전하는 공작을 수행하였다. 1945년 6월에 광복군 제3지대 북경지구 특파공작원으로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인 사병의 탈출공작을 수행하였다.
  • 전여옥 . . . . 4회 일치
         [[1981년]] [[한국방송공사]]에 입사하여 [[1994년]]까지 기자로 활동했고,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일본과 마초이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2004년]]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내며 노무현 정권 당시 정부와 여당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제18대 총선거에서 한나라당 영등포구 갑의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어 제17·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2년 3월에는 당의 공천과정에 반발, 탈당한 뒤 [[국민생각]]에 입당했다.
         *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과정 졸업, 정치학석사 (학위논문명 : 일본 정부개발원조의 특성과 개선방향)
         * [[참여정부]]
         * [[이명박 정부]]
  • 정광조 (1883년) . . . . 4회 일치
         [[한성부]] 출신으로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측근으로서 사전 모의 과정부터 깊숙이 가담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인호 (1854년)|박인호]] 등과 함께 실무를 맡았으며, 사후 수습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에서는 빠졌다. 당시 맡고 있던 직책은 천도교 대종사장(大宗司長)이었다.<ref>{{독립유공자|3124|박인호}}</ref>
         3·1 운동을 사실상 주도한 뒤 곧바로 [[의친왕]] 탈출을 꾀한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이듬해에도 천도교인 [[신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계속했다.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 발행에도 천도교 교무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분류:1883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대한민국의 천도교 교역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최석민 . . . . 4회 일치
         [[한성부]]의 출신이며 본적은 [[경성부]] 북부(北部) 이동(泥洞)이다. 의정부와 내각의 관리로 일하다가 지방의 군수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최석민은 관제 정비와 지방 제도, 세금 분야 등의 실무 전문가로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포상금 형식의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천원을 받았다. 조선귀족 중 남작 작위는 본래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칙임관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 중인 것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 최석민의 작위는 양자 [[최정원 (조선귀족)|최정원]]이 습작했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 1894년 의정부 관리 -->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1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
  • 표창원 . . . . 4회 일치
          *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적도 있다. 2013년 1월에 [[경향신문]]에 올린 한 칼럼에서 표창원은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어버렸고 무능하고 무력하다고 지적하면서 국정원이 위기라고 썼는데, 이 내용이 국정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 --4년 뒤의 실상을 보면 팩트폭행이었다-- 이 건은 1년이 지나서 '''무혐의가 명백하기 때문에''' 각하되었다. 애초에 판례 상 국가기관은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헌법에 나와있는 내용인데?!~~[* 해당 판례가 밝히는 정의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관은 당연히 국민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며, 비판으로 인해 더 나은 발전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를 욕한다고 [[고소미]]를 먹진 않으니까-- ~~하지만 [[대한민국 제1공화국|옛]][[대한민국 제4공화국|날]][[대한민국 제5공화국|에]]는 [[코렁탕|어떻게]] 했더라?~~]
         >경찰부정부패에 관한 학술적 이론들과 영국 경찰의 부정부패 방지책에 대한 고찰, 1998
         >새로운 부패방지 시스팀과 국가발전 모델 정립 : 제 1 회의 - 부정부패방지를 위한 경찰교육 개선책의 모색, 2000
  • 한병주 . . . . 4회 일치
          | 직책 =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 주재 대한 임정 경성지부]] 교통국 국장 대리
         [[한성부]] 출생이며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충청도]] [[청원군|청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86년에서 1892년까지 [[청주시|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1892년 [[한성부]]로 귀향하였고 줄곧 [[한성부]]에서 성장한 한병주는 1898년에서 1911년까지 경기도 시흥 양천향교에서 유교 성리학 훈도를 지냈으며 1919년 [[경성부]]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고 1920년 2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성지부 교통국 국장 대리(大韓民國 臨時政府 京城支部 交通局 局長 代理)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20년 2월 25일 자택에서 김태규(金泰奎)로부터 김창의(金昌義)가 보내온 인쇄물 100여 장을 받았다. 김창의는 당시 임시정부 산하 평북 독판부(督辦府)의 내무참사(內務參事)로 국내 [[연통제]] 조직 예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쇄물은 군무부 포고 제1호라는 제목 아래에 '서로 함께 분기하여 일본 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한병주는 이것을 받고서 1920년 2월 29일, 김순원(金純元), 오정주(吳政柱) 등에게 각 5매씩을 교부하고,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로 인하여 체포된 한병주는 1920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2년 3월, 한국독립당 입당하여 이후 조선 광복(1945년)이 지난지가 3년 후인 1948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에 당원 직위하였고 1948년 3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201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하였다.
  • 허경욱 . . . . 4회 일치
         *기획재정부 제1차관
         |직책 =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기획재정부 제1차관]]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양주 허씨]][[분류:경제협력개발기구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
  • 흥인군 . . . . 4회 일치
         그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물건값을 치를 때 당백전을 일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환전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상인이 많았다 한다. [[1872년]] [[경복궁 중건]] 공사가 끝나자 [[돈령부]]판사로 전직되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섭정이 되자,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그를 경멸했고, 의정부와 육조에 흥인군에게는 어떠한 우대나 혜택도 해주지 말라고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 실각 직전 민씨 일파에 의해 호위 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어 [[판종정경]]과 행판부사를 지냈다. 그해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중궁전의 임시 승후관(承候官)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1874년에는 교정 유사 당상(校正有司堂上)으로 [[선원보략]] 수정에 참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 호위대장을 거쳐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인 [[1874년]] [[12월]] [[의정부]][[좌의정]]에 올랐다. 이후 [[판종정경]]을 거쳐 [[1875년]] 영종정경이 되고, 같은 해 [[세자부]](世子傅)에 임명되었다가 1878년 세자사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문관이 아닌데도 특별히 문무과의 주시관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알력과 갈등을 눈여겨본 [[민승호]]는 [[명성황후]]에게 흥인군을 중용할 것을 상주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수용하였다. [[명성황후]]는 흥인군을 의정부의 대신으로 임명하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흥인군은 감격하여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거듭 왕비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결심했다.<ref name="ysys40"/> 그러나 그는 이 한 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ref name="ysys40"/> 조선 말의 정치가 [[윤효정]]에 의하면 "흥인군 집 대문을 들어서는 빈객과 출석하다시피 하는 수령들은 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 이르기까지 온통 뇌물에 관한 것 뿐이어서, 흥인군 집에서 이루어지는 내외 관료의 발탁, 임명 전형은 흡사 무역이 성한 도시 장터의 모습과 같았다.<ref name="ysys40"/>" 한다.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3회 일치
         우선은 그러므로 오스만과 오스트리아로 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동맹부터 구해두는게 가장 중요한데, 프랑스와 폴란드, 아라곤등이 여기에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 다만 최신패치부터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의 동군연합을 거절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럴경우 헝가리마냥 초반에 사기장수가 없는 폴란드는 박살날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이런 경우가 생기면 재시작하자(...)] 구호기사단에 걸어둔 독립보장은 괜히 오스만과의 1대1맞다이를 강요하게 하니 관두면서 본토와 달마티아 지방을 육로로 연결하는데 주력하자. 아, 그리고 상인공화정은 영토가 20개이상이 되면 부패도 (corruptions)가 오르기에 그거 줄인다고 수입이 줄어든다. 1.16이후로 외교력 100을 소모해서 상인공화정도 정부체제를 바꿀 수 있으니, 적당히 확장해뒀다 싶으면 바꿔두자.[* 부패도 감소비용을 없앨수도 있으나, 테크비용이 늘어나기에 최종적으로 국력이 약해진다.]
         장미전쟁이 끝나면 정부체제가 고유 정부체제인 잉글랜드 왕정(English Monachy)으로 바뀐다. 효과는 행정 22렙이후에 뜨는 입헌 군주정이랑 비슷한 편.그외에 영토상황으론 백년전쟁도중이란걸 표현하기 위해 프랑스지방에 영토를 들고 있으며, 포르투갈이랑 시작시 동맹상태다. 근데 문제는 잉글랜드가 백날 힘을 써봐야 프랑스 육군을 절대 못이긴다는거(...) 플레이방식이 둘로 나뉘는데, 우선은 대륙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게 팔고(...) 조용히 식민지 개척이나 준비하는 것과 속전속결로 프랑스를 처리해서 유럽 최강으로 나아가는것.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해군 . . . . 3회 일치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s-5.3|국가와 정부]]''' 기술 연구시 '''{{{#green +2%}}}'''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s-5.3|국가와 정부]]''' 기술 연구시 '''{{{#green +2%}}}'''
          * '''Local Military Government(지방 군사 정부)'''
  • 강원도 . . . . 3회 일치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2006년 폐광촌 발전을 위해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으로 내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카지노]] 시설인 '''[[강원랜드]]'''를 강원도 [[정선군]] [[사북역|사북읍]]에 만들었다. [[애초에]] 강원랜드는 시장논리가 아닌 정치적 고려로 인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관계자들도 성공할지 반신반의였는데, 생각 외로 [[대박]]이 나서 지역경제에 꽤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과장 좀 보태면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군]] 뿐만 아니라 그 [[태백시|주변]] [[영월군|시]][[평창군|군]]에도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물론 강원랜드 지분의 51%는 강원도, 나머지 49%는 민간자본[* 민간자본이라니 일견 굉장히 사악해보이는 용어지만, 49%의 지분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있을 뿐이고 상장을 통해서 자본 증대를 하였기에, 단순히 지역 경제만이 아닌 주주의 이익 역시 보장해야 한다. 한국은 이렇게 공영을 담당하면서도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한다는 모순에 휩싸인 주식들이 여럿 있긴 한데, 이를 해결할려면 당장 모든 공기업 주식을 정부가 사들여 공영화하거나, 아예 민영화를 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한국 정치인중에 이 문제를 주장할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고 무작정 공기업에 대한 가치만이 널리 퍼진채 민영 자본은 무슨 사악한 단어처럼 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여튼 그럼에도 지역 주민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시설이라(...) 도박중독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생기고 때때로 [[너 고소|소송도 걸리고]] 사업의 특성상 그리 순탄치는 못한 길을 걷고 있으나 한동안 폐업은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타 [[광역자치단체]]와는 달리 [[거점국립대학교]]가 압도적인 대입성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여느 광역단체보다 수도권이 가까운 편이기도 하고 ITX-청춘과 KTX 경강선 개통으로 교통이 좋아진 요인과 90년대 이후에 가속화 된 [[인서울]] 대학 선호 현상으로 상위권 수험생들이 가까운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현상을 막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점국립대학교]]라는 특성이 있어서 인서울 진학 대신 강원대로 진학하는 강원도 학생들이 조금은 있다.] 현재는 춘천, 원주의 도시간에 각각 [[강원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우수한 신입생과 정부의 재정 지원을 나눠 먹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로 올림픽을 개최해 이득을 본 나라가 많지 않은 만큼 향후 강원도가 올림픽 효과를 보려면 사후관리가 중요할 듯. 당장 올림픽유치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본다기보다는, 올림픽 유치를 통해 따라오는 각종 혜택과 예를 들자면 제2영동고속도로와 복선 같은 중앙정부 지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성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김관용 . . . . 3회 일치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제6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경상북도지사 예비후보였던 [[박승호 (1957년)|박승호]]는 2014년 3월 3일에 김관용의 석사 학위 논문과 또 다른 표절 대상 논문을 입수해 대조한 결과 본지가 보도한 29~48페이지까지 2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 원문 그대로 실은 것뿐만 아니라 4페이지에서 25페이지도 표절했다고 밝혔다. 박 예비후보는 또 "김관용 예비후보의 같은 논문 48~58페이지에서도 1999년 10월 경기개발연구원 [[이기영 (학자)|이기영]], [[김응례]] 연구원의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지방정부([[경기도]])의 인센티브 연구'라는 연구보고서 38~49페이지를 그대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박승호 (1957년)|박승호]]는 "김관용 예비후보의 논문은 표절을 넘어 복제 수준이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즉시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f>[http://www.weekly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36 박승호 "김관용, 논문 표절 또 있다"]《위클리오늘》</ref>
         이어 [[박승호 (1957년)|박승호]], [[권오을]] 예비후보는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관용의 장남에 대한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장남의 병역비리가 드러난 김관용 지사는 사퇴해야 한다."며 "김관용 지사의 부인이 1997년 10월 무렵 J병원 행정부장과 내과의사에게 2500만원을 주고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장남의 병역을 면제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어 "병원 행정부장은 배임수재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내과의사도 같은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250만원을 선고받았다."면서 "돈을 건넨 김관용 지사의 부인은 배임증재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 3년이 지나는 바람에 처벌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논란은 지난 2002년에 김관용이 [[구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부터 시작되어 선거 때마다 이어지고 있다. 김관용 측은 이 의혹에 대해 "만약 병역법을 위반했다면 검찰과 병무청이 재검심청과 관련한 법집행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국립대병원인 [[경북대학교병원]]에서도 일반병원에서 진단받은 병명과 같은 아토피성 천식 판정을 받았고 검찰이 지정해 준 [[세브란스병원]]에서도 동일한 진단을 받았다."고 덧붙였다.<ref>[http://www.weekly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43 與 공천위 "김관용 지사 아들 병역비리의혹 논의할 것"]《위클리오늘》</ref>
  • 김동욱 (1959년) . . . . 3회 일치
         | 한국정부학회 부회장
         | 전자정부특별위원회 위원
         | 정부산하기관 경영평가단 위원
  • 김영한 (1900년) . . . . 3회 일치
         '''김영한'''(金永漢, [[1900년]] ~ [[1980년]]<ref>《한국일보》 (1987.12.18) [http://www.kinds.or.kr/imgdata8/1987/12/18/19871218HKM07.pdf 알뜰살림 속에 숨은 內助... "보통 부인"]</ref>)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의 장인이다.
         * 《여성신문》 (2007.3.9) [http://www.womennews.co.kr/news/view.asp?num=32835 이야기 여성사 -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노태우 가]]
  • 김진향 . . . . 3회 일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반도 통일에 관한 담론의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로는 북한 체제, 남북관계, 평화통일 등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가 [[세종연구소]]에 들어가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제32대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정치인)|이종석]]을 만났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인수위원회에서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설계 작업을 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에서 NSC 한반도 평화체계담당관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남북 평화체계를 다루다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더 폭넓게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여러 번 교섭과 협상을 했다. 학자 입장에서 북한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근무를 자원했고 [[2008년]] 2월부터 4년간 [[개성]]에서 근무했다. 이 때 개성에서 발생하는 신청·세무·회계·세금·임금협상 등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북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경험을 했다.<ref>원희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2094 (원희복의 인물탐구)카이스트 김진향 교수…종북을 각오하고 ‘북한’을 말하다]. 주간경향. 2016년 1월 16일.</ref>
         [[분류:196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노무현 정부]][[분류:북한학자]]
  • 김형기 (법조인) . . . . 3회 일치
         [[전두환 정부]]의 간첩 조작 사건으로 밝혀진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재재 상고심에서 주심 대법원 판사를 맡은 이유로<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3342.html]</ref>를 맡은 이유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가 2016년 11월 13일에 발표한 반헌법 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ref>[http://moneys.mt.co.kr/news/mwView.php?type=1&no=2016071408268072968&outlink=1]</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때 선거 거부를 주장하다 기소된 전 서울대 학생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1월 19일자</ref> 2월 9일에 통혁당 재건과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을 선고받은 [[지정관]]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박현채]]와 [[양정규]]에게 각각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3년과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9일자</ref> 2월 22일에 '옛 석굴암'이라는 상호로 공예품 판매업을 하면서 문공부 장관의 허가없이 자신의 소장품인 유형문화재 청자 등 이조 자기류 10점을 점포에 진열하거나 매매 목적으로 진열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22일자</ref>
  • 남유진 . . . . 3회 일치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제22회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총무처, 내무부(이상 현 [[행정자치부]]), [[산림청]] 등에서 근무하다가 [[노태우 정부]] 후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관선 경상북도 [[청송군]]수를 지냈다. 이후 다시 내무부, 행정자치부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김관용]] 구미시장[* 15 ~ 17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밑에서 구미시 부시장을 지냈다.
  • 단종 . . . . 3회 일치
         즉위 초에는 주로 의정부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행했는데, 단종실록 초기에는 의정부의 논의를 그대로 따르는 기록이 무척 많다. 하지만 즉위년 후반에는 점차 스스로 하는 정치가 많아지며 즉위 1년 쯤에는 이미 의정부의 의견에도 반론하고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박정수(정치인) . . . . 3회 일치
         ||<#003990><-2><:> {{{#FFFFFF ''' 문민정부 (1993 ~ 1998) ''' }}} ||<#00AA7F><-3><:> {{{#FFFFFF ''' 국민의 정부 (1998 ~ 2003) ''' }}} ||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박진옥 . . . . 3회 일치
         || 소속팀 ||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 (2005~2012)''' [br] [[상주 상무|광주 상무]] (군 복무) (2009~2010) [br] [[대전 시티즌]] (2013) [br] [[광주 FC]] (2014) [br] [[용인시청 축구단]] (2015~2016) [br] [[FC 의정부]] (2017) ||
         ==== [[FC 의정부]] ====
         2016 시즌을 마무리로 [[용인시청 축구단]]이 해체되자 2017 시즌부터 [[K3리그]] 소속 클럽인 [[FC 의정부]]에 입단하였으며 '''주장'''으로 선임되어 1년간 활약하고 '''현역 은퇴'''를 하였다.
  • 서상일 . . . . 3회 일치
          일단 서상일은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는 하였으나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하자 한사코 이를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7</ref>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정치깡패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론에 떠밀려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협상을 갖게 되었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신익희]]에게 양보의사를 밝히는대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민주당측이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ref name="서158">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페이지</ref> 일단 [[신익희]]는 이 제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으로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 신구파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신익희가 신파를 설득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익희ᆞ조봉암 회동이 이루어진지 6일만에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안에서 뇌출혈로 급사함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는 엉뚱하게 조봉암으로 되어버렸지만 민주당은 당차원에서 조봉암을 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당 최고위원 김준연은 조봉암의 사상적 문제점을 들어 이승만 지지를 공개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때 서상일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조봉암]]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좋은 결론을 심사숙고하려 했다. [[조봉암]], 서상일 등은 원래는 선거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모두 민주당측에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으나 신익희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조봉암이 사실상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자 선거말미에 가서 부통령 후보 박기출만을 사퇴시켰던것이다. <ref name="서158"/> 대선이후 서상일은 겉으로는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 운동을 추진했으나 이미 대선후보 결정당시 [[조봉암]]과 감정이 상했기 때문인지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사실상 1인정당인 민주혁신당을 창당했으나 이 당이 사실상 힘을 쓰지 못하자 서상일 또한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어 정계은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1962년]]에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 서영택 . . . . 3회 일치
         |직책 =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차관보|재무부 제2차관보]]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달성 서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국세청장]][[분류:대한민국의 건설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하버드 로스쿨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세무사]]
  • 성역 도시 . . . . 3회 일치
         2017년 1월 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역 도시들에 대해서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전국의 39개 도시와 364개 카운티 정부가 이에 대항하여 성역도시를 유지할 것을 선언했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데이드 카운티는 시 재정난으로 연방정부 지원금이 중단될 경우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역 도시 선언을 중지했다.[[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965721 (참조)]]
         시애틀 시는 연방정부의 재정중단 명령에 따라 8500만 달러의 예산을 잃게 되었다. 참고로 시애틀 시는 50억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다.[[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963815 (참조)]]
  • 송진현 . . . . 3회 일치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3년 서울형사지방법원, 1985년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지원장, 1987년 [[서울가정법원]], 198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199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1992년 [[대구지방법원]] 1994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1996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1997년 서울지방법원, 2000년 2월 [[대전고등법원]], 2001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였다. 2005년 11월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 부장판사가 되었으며 2006년 6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동부지방법원]], 2008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2009년 2월에 사직하고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변호사를 하였다. 보건의료직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면서 변호사를 하고 있을 무렵인 2015년 8월 [[박근혜 정부]]에서 제10대 [[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자문위원을 겸직하였다.
         * [[서울고등법원]] 특별8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0월 22일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효순·미선양 사망 사건'과 관련해 미군 2명을 소환해 조사했던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상대로 "관련 수사 기록을 공개하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들이 청구한 정보 내역 가운데 피의자 신문 조서 등은 정보공개법상 비공개 대상 정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한 미군측 군사재판 원고 사본 등은 원심대로 한미 관계 등을 감안해 공개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며 원심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65906]</ref>10월 25일에 지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집회에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송모씨가 "단체협약에 정한 징계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며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소송에서 "노조활동에는 집회참가도 포함되고 따라서 [[집시법]]에 의해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당연해고할 수는 없다”면서도 "집회 도중 자의적인 폭력행위는 조합활동의 일부라고 볼 수 없다"며 "집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로 당연해고 사유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83535]</ref>
  • 신영식(만화가) . . . . 3회 일치
         1987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홍보 만화를 그렸는데 지금 보면 꽤나 엉터리다....노태우가 연대장이던 시절, 야간 보초서던 징집병에게 수고한다면서 뭐라도 사먹으라고 돈주려고 했더니만 지갑을 안가져오자 손목시계를 그 보초병에게 줘서 이거라도 [[전당포]]에 팔아 먹을 거 사먹으라는 게(...) 나온다. 지금 봐도 어이가 없지만 이 만화를 본 당시 어른들도 이건 너무 엉터리라고 어이없어했다.... 문제는 같은 시기에 나온 다른 노태우 홍보만화에서 신영식 만화에서만 이게 나왔다는 것.
  • 아스팔트 우파 . . . . 3회 일치
         과거에도 대한민국에 우파 정치단체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현존하는 아스팔트 우파와는 크게 관련성이 없다. 제1공화국 시기 [[자유당]]과 연계된 [[이정재]]의 [[화랑동지회]] 등 [[정치깡패]] 부류의 조직이 존재했으나, [[조직폭력배]]로서 처단, 와해되어 현재의 아스팔트 우파들은 이러한 조직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군사정권 시기에 정부에서는 우익성향을 가진 관변단체를 만들었으나, 민주화 이후로 이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고 현재의 조직들은 이러한 단체들과의 연관성이 모호하다.
         [[대한민국]]에서 '아스팔트 우파'를 자칭하는 단체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에 주로 조직되고 나타나게 되었다. 주로 사안에 따라서 정부나,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시위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독립적인 단체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정계의 압박에 따라서 [[전경련]] 등에서 지원을 받는 등, 이면에서는 우파 정치인들의 지원과 지시를 받고 있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0656.html (참조)]]
  • 예천군 . . . . 3회 일치
         이걸로 정부가 안동, 예천 통합을 제안했지만 예천에서는 예천읍 주민들을 중심으로 반대하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갈 길이 멀다. 다만 대구 - 경산과 같이 연담화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통합은 요원하지만 대신 도청신도시의 행정구역 이원화로 인한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버스요금 단일화 및 광역환승, 택시영업구역 일원화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통합을 한다고 해도 면적이 너무 커져서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다소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 [[권영자]] : 문민정부 제2 정무장관, 계명대 교수
          * [[유학성]] : 전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 전 공무원(중앙정보부장, 안전기획부장), 전 국회의원. 신군부 출신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있던 [[하나회]]를 후원, [[12.12 사태]]에 가담하기도 했다.
  • 요시다 세이지 . . . . 3회 일치
         사실,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한정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증거는 요시다 증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위안소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 " 자체에 제기되는 인권 문제이며, 강제연행의 유무나 피해자들 증언에 관한 세부 논란은 '각론'에 불과하다.
  • 울릉군 . . . . 3회 일치
         2016년, 국내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인구 네자리로 떨어지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7/2010090701865.html?rsMobile=false|2005년엔 9,538명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1만 명 넘어섰다고 마냥 좋아하기도 그런 게 지역주민들에게 배값을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걸 노리고, 유령주민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을 옮겨놓으면 10분의 1가격에 배를 타니 꽤나 혹하는 듯 하다.] 그러나 2017년 7월 기준으로 다시 1만 명을 넘어갔다...는 2017년 11월 기준 9,996명으로 떨어지며 네 자릿수가 되었다..가 2018년 6월 기준 10,010으로 다시 1만 명 선을 회복했다.~~다이나믹 인구~~
         [[러일전쟁]] 때는 울릉도 역사 상 드물게 주변국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함대는 울릉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여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 따윈 없고, 일본이 자의적으로 울릉도를 사용했다. 그리고 근해에 침몰한 러시아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은 군자금으로 실린 막대한 금괴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765525|관련기사]]
         울릉도에서 굴러다니는 차는 딱 2종류라고 봐도 좋다. [[경차]] 아니면 [[현대 싼타페|싼타페]]같은 [[SUV]]. 우선 도동이나 저동 등 대부분의 마을길 폭이 좁기 때문에 [[경차]]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경차]]로도 울릉도의 가파른 산길을 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한다. [[일본]]식 경차처럼 배기량 0.66리터 엔진을 달면 상대적으로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퍼지기 쉽다고 하여 [[대한민국]]에서 티코가 나올 때부터 0.8리터로 내놓았고 [[2008년]]부터는 정부에서 배기량 1.0리터로 규정을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퍼질 듯... 그래도 산길이 많고 해안도로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돌들이 많기 때문에 차량 하체도 긁히기 쉬워서 경차보다 튼튼한 차를 산다면 같은 급의 중형 세단보다는 SUV를 사게 된다고. 심지어 '''이 동네의 경찰 [[순찰차]]와 [[택시]]도 전량 SUV다.''' 거기에 울릉도는 눈이 꽤 오는 곳이니 '''SUV가 아니면 [[답이 없다]].''' 거기에 군 내에 [[LPG]] 충전소가 없다는 점을 유의하자. 따라서 택시가 다니더라도 LPG 차량이 없고 100% 디젤차다. 그리고 세단을 대여해 오는 관광객들을 보다못한 택시나 관광차량이 중앙선침범을 빈번하게 하니 아예 택시를 이용하자. 요금은 기본 2,800원으로 포항 시내와 동일하다.
  • 원피스/839화 . . . . 3회 일치
          * 제르마는은 원래 세계정부 가맹국이고 "레벨리"에도 참석했으나 올해부터는 박탈. 그러나 저지는 빅맘과 연줄을 만들었으니 오히려 이득이라 말한다.
          * 제르마 왕국은 원래 세계정부 가맹국이며 "레벨리"에도 참석하고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출석권이 박탈될 것이다.
          * 이들이 빅맘과 연루된 이상 세계정부도 그들을 적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러나 저지는 "그 대신 얻게 될 힘"은 절대적이라며 "제르마는 변한다"고 말한다.
  • 윤진식(국회의원) . . . . 3회 일치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재경직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는 [[관세청]]장,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장관 역임 당시에는 대북송금 특검을 반대할 정도로 꽤 진보적이었다. 기회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이근택(1865) . . . . 3회 일치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 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법부 대신과 군부 대신을 역임하였는데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 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결국 [[을사조약|다른]] [[일제강점기|방]][[경술국치|식]]으로 정부를 [[망국|전]][[전복(동음이의어) #s-2|복]]시켰다.-- --그 [[전복]] 아니다.-- 그 이후로 [[조선]] 민중들과 의사의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로는 [[일본군]]을 호위 대동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 이만섭 . . . . 3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국회의장]][[분류:대한민국의 신문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최규하 정부]][[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분류:김영삼 정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김대중 정부]][[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대륜중학교 동문]][[분류:한국국민당 (1981년) 당원]][[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국민신당]][[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윤치영]][[분류:김종필]][[분류:동아일보]][[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1932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합천 이씨]]
  • 이상정 (1897년) . . . . 3회 일치
          | 사망지 = [[대한민국|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뇌일혈로 사망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br/>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6082 두산대백과사전 - 예비역 대한독립군 중장 이상정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 이철우(1955) . . . . 3회 일치
         2018년 8월 29일, 뜬금 없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찾아 왔다. 회의가 열린 구미의 경제에서 초당적 협력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지역예산 배정문제를 언급한 것을 보아, 자유한국당 소속이지만 지역 국회의원이 못 미더웠나보다.-- ~~이점은 당연해 보인다 현재 정부 예산 편성안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 어느 당인지 생각하면~~
         2018년 9월 4일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하락하는 경북 경제의 해법으로 4차 산업혁명을 제시하였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맞추어 포항, 울릉, 울진, 영덕을 중심으로 동해안 에너지 클러스터를 구축하여 풍력, 수소에너지 등 신재생 에너지 산업 확장에 나서고 농어업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맞게 스마트팜 혁신 밸리와 스마트 양식장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http://www.etnews.com/20180903000231|[인터뷰]이철우 경북도지사...'동해안에너지클러스터와 4차 산업혁명 일자리 창출']]
         [[2017년]] [[6월 20일]] 제주도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타운홀미팅에서 문재인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얼마 못 갈 것"이라는 발언[* 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기 위해 지지층 결집용으로 격한 말을 던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으로 파문이 일었다. 내년 지선과 총선에서 당이 승리를 결의한 것과 달리, 문재인의 현재 하는 행동이 박근혜처럼 탄핵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면서 비난을 한 것. 이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측에서는 야당의 막말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며 정부 흔들기를 그만하라고 비판했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01&aid=0009348444&sid1=100&date=20170620&ntype=RANKING|연합뉴스]] 본인은 이 사태를 단순히 문재인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한 것으로 해명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830754|한국당 이철우 '문 대통령 탄핵 암시 발언' 논란에 "경각심 차원의 말"]]
  • 임은정(법조인) . . . . 3회 일치
         || '''경력''' || 인천지방검찰청 검사[br]광주지방검찰청 검사[br]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br]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br]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 ||
         2015년 이후부터는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2015년 12월 3일 검사로서의 직무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받아 심층적격심사[* 2004년 법무부는 7년마다 한 번씩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검사'를 골라내겠다며 적격심사제도를 도입했다. 적격심사 대상은 검찰 내 특정 기수 전체이며, 법무부는 이 가운데 심층심사를 할 사람을 걸러내 특정사무감사를 진행한 다음 적격심사위원회를 연다. 여기서 최종 탈락한 인물은 강제로 퇴직당한다. [[검찰청법]] 제39조 참조.]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검찰 상부가 '[[보복|찍어내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수많은 네티즌들이 격분하였다. 무죄 구형 후 법무부의 한 간부가 ‘임은정이 적격심사 얼마 남았냐’고 묻더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듣고 ‘적격심사를 계기로 자르려는구나’ 싶었다고. 자신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한겨레]] 보도가 나오기 전 실제로 ‘(검찰 상부에서) 자르기로 했으니 마음의 준비 해야 할 것 같다’는 동료의 귀띔을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때는 돌아버리겠더라. 누가 볼까 싶어 집까지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는데, 현관문을 닫고 주저앉아 ‘너무 힘듭니다, 견디겠습니다만, 너무 힘듭니다’하고 신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친한 동료들까지 나와 연락하길 주저한다고 느껴질 때는 정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 2015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
  • 장평도정 . . . . 3회 일치
         우성령 이석은 [[안동 권씨]] 종손(從孫)의 딸과 혼인하여 덕창부령(德昌副令) 이자인(李自仁) · 시천부령(矢川副令) 이자의(李自義) · 해평부령(海平副令) 이자례(李自禮) · 화성부령(化城副令) 이자지(李自智) · 가조부령(加祚副令) 이자신(李自信)의 5남을 두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장평도정의 손자 수주정 이윤인의 13대손이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송산면]] 추동(후일 [[의정부시]] [[신곡2동]] 추동부락)에 안장되었다. 현재 묘소는 [[신곡2동]] 추동부락 [[추동공원]] 내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은 그의 5대손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의 다섯째 아들이다.
  • 장헌식 . . . . 3회 일치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용인]]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
  • 전성군 (1488년) . . . . 3회 일치
         생전 관직은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주부]] 등이었지만 후손들의 거듭된 출세로 [[증직|증]]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호조]][[판서]]와 [[증직|증]] [[이조]][[판서]]를 거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는 등 거듭 증직이 [[추증]]되었다. [[대한민국]] 초기의 정치인 만송 [[이기붕]]은 그의 13대손이다.
         [[1527년]](중종 22) [[7월]] [[함열읍|함열]][[현감]](咸悅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면직되었다. 이후 좌익찬(左翊贊), [[사복시]]주부, 겸[[한성부]][[참군]](兼漢城府參軍), [[장예원|장예]][[사평]](掌隷司評), [[종부시]]주부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용강 [[현령]](龍岡縣令), [[평양]][[진관]] 병마첨절제 도위,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정(副正) 이공장(李公檣)의 천거를 받았다가 [[사헌부]]로부터 성품이 본래 침착하지 못하고 소행도 탐욕스럽고 간특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ref>중종실록 94권, 1541년(중종 36년, 명 가정 20년) 2월 17일 갑술 1번째기사, "헌부가 천거하는 자들이 사적으로 천거를 함으로 폐단이 심하다고 아뢰다"</ref>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종보(鄭宗輔)의 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는데, 일곱째 아들이 권신 [[이량 (조선)|이량]]이고, 고명딸은 [[청송 심씨]] [[의정부]][[영의정]][[심연원]]의 아들이자 [[좌의정]] [[심통원]]의 조카 [[심강]]에게 출가했다.
         사후 여섯째 아들 [[이량 (조선)|이량]]의 영귀로 [[증직|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다시 [[증직|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른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성군(全城君)에 추봉되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인 [[이기붕]]은 그의 아들 [[이량]]의 직계 후손이었다.
  • 전예용 . . . . 3회 일치
         }}</ref>)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사회과장, 황해도청 산업부 농업과장, 경성세무서 서무과속, 개성세무서속 등을 거쳐 경기도 광주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학무국장 보좌관으로 근무했으며 고려대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었다가 [[서울특별시 부시장]]이었고 [[6.25 전쟁]] 중 [[서울특별시장]] 직무대리를 역임했다.
          |제목 = 역대 정부부처 장차관 - 건설교통부
         [[분류:1910년 태어남]][[분류:199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부흥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건설부 장관]][[분류:서울특별시 부시장]][[분류:한국은행 총재]][[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이승만]][[분류:박정희]][[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정선 전씨]]
  • 정근모 . . . . 3회 일치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대한민국의 과학기술처 장관]][[분류:한국과학기술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래희망연대]][[분류:친박]][[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명지대학교]][[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동문]][[분류:미시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 정재학 (1856년) . . . . 3회 일치
         [[대구은행]]의 이 같은 [[민족자본]] 수호 의지는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자본구성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미군정]]이 우리 정부에게 넘겨준 주요 은행 주식분포를 보면 [[조흥은행]]의 경우 한국인 지분비율이 54%에 달한 반면 [[상업은행]] (36%) [[저축은행]](6.3%) [[신탁은행]] (9.4%) [[상호은행]](9.5%) [[조선은행]](3.5%) [[식산은행]](6.7%) 등 나머지 은행들은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에서 미군정 관리에 이어 우리 정부로 귀속됐다. 일제 당시 총독부 등이 민족자본 기반의 은행들을 수탈, 국유화시키거나 일본인에게 주식을 넘겼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78년 1월12일 5면</ref>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940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정충원 . . . . 3회 일치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 을(功勞 乙)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3월 31일 평안남도 성천군수, [[1943년]] [[3월 29일]]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고 [[1942년]] [[4월 8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56년]] 10월부터 [[1961년]] 4월까지 조흥은행 은행장, [[1958년]] [[금융통화위원회]] 정위원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
  • 정칠성 . . . . 3회 일치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해 부위원장이 되고,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그해 [[8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차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1948년]]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참가차 3.8선을 넘어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조선]]에 머물렀다. 그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 조긍하 . . . . 3회 일치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8383&mobile&categoryId=1639 조긍하 - 네이버 지식백과]</ref>. 그 후 [[테너]] [[성악가]]와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사진가|사진]] 촬영과 [[영화]] 분야로 전향하였다. 사진작가의 관록으로 조감독 수련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되었는데, [[1952년]]에 《베일부인》을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황진이》([[1956년]]), 《곰》, 《육체의 길》([[1959년]]), 《인간만세》, 《과부》([[1960년]])등의 영화를 감독하였고, 시나리오도 직접 집필해왔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상해임시정부》,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지사들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1300032921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30&officeId=00032&pageNo=12&printNo=11181&publishType=00020 故(고) 趙肯夏(조긍하)감독의 人間(인간)과 作品(작품)세계 고지식하면서도 유머풍부 - 1982년 1월 30일 경향신문]</ref>.
         * 1969년 《[[상해 임시정부 (영화)|상해 임시정부]]》 - [[신성일]], [[김지미]]
  • 진희규 . . . . 3회 일치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수리조합 조합장, 수성공립보통학교 학부형장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7년]] [[1월 20일]]부터 [[1938년]] 6월까지 달성동부금융조합 조합장, 1928년 경상합동은행 대주주를 역임했으며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대구상공은행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7년]] [[7월 1일]] [[조선총독부]] 시정 25년 기념 박물관 건설비 1,000원, [[1938년]] [[8월 4일]]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비 1,000원을 각각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았으며 광복 이후인 [[1949년]] [[3월 1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했다.
         [[분류:1878년 태어남]][[분류:195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최광수 (공무원) . . . . 3회 일치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창신초등학교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주 최씨]]
  • 최세창 . . . . 3회 일치
         * [[노태우]]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하나회]][[분류:경동고등학교 동문]][[분류:경주 최씨]][[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 최지우(영화배우) . . . . 3회 일치
         [[황금의 제국]] 후속작인 [[수상한 가정부]]에서 여주인공 [[박복녀]]로 출연하기로 확정되어 초반 분량은 촬영을 마친 상태. 이성재와 짝을 맞추어 극을 이끌어 나간다. 다만 연기력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원작인 [[가정부 미타]]의 팬들은 최지우가 여주인 것에 대해 상당히 불안해 하는 중.
          * 2013년 SBS 《[[수상한 가정부]]》 - [[박복녀]]역
  • 추미애 . . . . 3회 일치
          *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여당]] 대표[*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가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 그리고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s-1|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으나, 말 그대로 '비상대책위원장'이었을 뿐 당 대표는 아니었다. 박근혜가 [[참여정부]] 시절 당 대표였던 때도 있었으나, 그땐 '[[여당]]' 대표가 아니라 '[[야당]]' 대표였다.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 2004년~2006년 한나라당 대표)]
          * 2000년 7월 5일, 동료 의원들 및 기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X같은 [[조선일보]]', '[[이회창]]이 이놈' 등의 발언을 했고, [[동아일보]] 기자와 싸움이 번져 '사주같은 놈', '누구의 지시를 받아 기사를 썼느냐'는 등의 불호령을 내렸다. [[정동영]] 등 동료 의원들이 말리면서 데리고 나오자 '정의가 바로 서야 하는데 왜 이러느냐' 하고 마당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다음 날, 조선일보에는 추미애의 'X같은 조선일보' 발언이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곤욕을 치렀는데, 오프 더 레코드로 사석에서 나온 말을 기사화한 것은 업계 상도의에 어긋나는데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보복성 보도였다는 평가가 주론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7095|그날 추미애 의원에게 일어난 일들]]
  • 현진건 . . . . 3회 일치
         현진건의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다시 경운(炅運)·철운(轍運)·영운(映運)·양운(暘運)·붕운(鵬運)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경운이 바로 현진건의 아버지이며, 봉호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화국|전보사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숙부 '''[[현영운|영운]](映運)'''은 아내 [[배정자|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ref>당시 전보사는 농상공부대신의 관리를 받으며 전보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였으며, 1등사와 2등사로 구분되었다. 한성(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의주, 경성, 함흥, 회령이 1등사에 속했고 대구는 2등사였다. 통신원 국장이란 직책은 수준은 미비할 망정 국가의 전신, 전화, 전기는 물론 우편과 운송 분야와 관련한 시설과 제도를 관리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나 역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3~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 홍인한 . . . . 3회 일치
         과거 급제 후 청요직을 거쳐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으며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의 춤과 노래실력을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성대중]]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승지, 사간, 대사헌, 호조와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1774년 의정부우의정, 1775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등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다. 호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 홍진기 . . . . 3회 일치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ref>{{서적 인용|url=|제목=한일회담-제1차 회담을 회고하면서|성=유진오|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법무부 차관, 장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분류:혁명재판 기결수]][[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한국의 일제 부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서울무학초등학교 동문]][[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이승만]][[분류:남양 홍씨 (당홍)]]
  • Crusader Kings 2 . . . . 2회 일치
          5. 가문의 정보. 예시의 우어 켄셀라이그 가문은 기독교를 믿으며, 봉건제 정부를 두고있다. 오른쪽에 있는 버튼들로 가문의 계보도 등을 볼 수 있다.
         == 정부 형태 ==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2회 일치
         "디시전"이라는 기능이 생겼다. 정부 정책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인데, 이 때문에 침략전쟁을 벌이는 국가(독일, 일본 등등)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이벤트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던 HOI2에서는 등을 떠민다는 느낌이 강했다.
          선택한 내각진의 암살을 시도한다.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은 암살할 수 없지만 해당 인물이 다른 내각도 겸임하고 있다면 암살할 수 있다. 가끔 AI가 저우언라이같은 네임드를 암살해버리면 기분이 묘해진다.
  • GHQ . . . . 2회 일치
         GHQ는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로서, '총사령부'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연합군]][* 소수의 영연방군이 참가하였으나, 대부분은 미군이었으므로 사실상 미군.]이 [[일본]]에 --[[막부]]--[[군정]]을 펼치기 위하여 설치한 사령부를 뜻한다. [[맥아더]]를사령관으로 하였으며, GHQ에서 지시하는 점령정책이 일본 정부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1945년에 설치되어, 1952년에 강화조약이 맺어지면서 폐지되었다.
         GHQ 통치 시기는 직접적인 군정이 아니라, GHQ의 지시를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시행하는 간접군정 방식이었다. GHQ의 영향력은 경제, 문화, 정치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미쳤는데, 정치적 측면에서는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이 개정되었으며, 지방자치와 선거제도가 개혁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켰으며, 경제 개혁으로 [[재벌]]이 해체되었고, [[농지개혁]]으로 농촌의 [[지주]] 계급이 해체되었다.
  • The Men Who Built America . . . . 2회 일치
          효율 향상을 위해 카네기가 영입한 인물. 효율적이지만 냉혹한 정책을 벌인다. 그 결과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할 뻔 하기도.
          공화당 정치인. 전쟁 영웅. 뉴욕 주지사 시절 기업을 엿먹이는 법안을 내놓는 반 독점론자였다. 이에 기업가들은 잉여로운 자리인 부통령에 앉혀 무력화시켰으나 대통령이었던 매킨리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총맞고 죽으며 대통령으로 승격. 반 트러스트 법안으로 기업가들을 엿먹인다.
  • 건즈 고어 앤 카놀리 . . . . 2회 일치
         금주법으로 인해 밀주업자들이 활개를 치게 되자 정부는 이들을 막기 위한 약물을 만드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부는 이 계획을 포기했고, 이로인해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원은 실업자가 된다. 이 때 프랭키가 연구원에게 접근해 약물 한 갤런만 주면 유명하게 해주겠다고 꼬셨던 것. 이후 프랭키는 그 약물을 이용해 세인트 패트릭 데이에 술을 마신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연구원은 자길 데리고 떠그타운으로 가면 모든 걸 고칠 수 있을거라며 카놀리를 설득하려 하지만, 카놀리는 군대가 떠그타운을 통째로 날려버리려 하니 고칠 이유도 없고, 네가 만든 약물 맛이나 직접 체험하게 해주겠다며 박사를 약물통 안에 처박고 프랭키를 잡으러 간다.
  • 경기도 . . . . 2회 일치
         [[2017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경기도의 각 시와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인구는 12,783,741명이고 남여비율은 1.01로 전반적인 [[성비|남초]] 지역이다. 시군별로는 [[포천시]] (1.11)와 [[연천군]] (1.11)가 가장 높고, [[시흥시]] (1.10), [[화성시]] (1.07),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1.06), [[오산시]] (1.06), [[안산시]] (1.05), [[안성시]] (1.05), [[가평군]] (1.05), [[이천시]] (1.04), [[안성시]] (1.04), [[양주시]] (1.03), [[파주시]] (1.03), [[양평군]] (1.02), [[여주시]] (1.02), [[수원시]] (1.01), [[하남시]] (1.01), [[김포시]] (1.01), [[남양주시]] (1.00), [[부천시]] (1.00), [[의왕시]] (1.00), [[구리시]] (0.99), [[군포시]] (0.99), [[동두천시]] (0.99), [[안양시]] (0.99), [[용인시]] (0.99), [[광명시]] (0.98), [[성남시]] (0.98), [[고양시]] (0.97), [[의정부시]] (0.97), [[과천시]] (0.95) 순으로 높다.
         [[의정부시]]''' || 議政府市 || 177,065 || 438,061 || 2.47 || 81.54
  • 고성국 . . . . 2회 일치
         [[고려대학교]] 정외과 강사 시절인 1986년 9월 27일 [[대한민국 국가보안법|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형사지법으로부터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9270032921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9-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2617&publishType=00020</ref> 당시 공안당국은 다산기획 대표이던 고씨가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좌익]] 서적 100여 권을 들여와 번역한 뒤, 이를 [[백산서당]] 대표 이범(현 [[흥사단]] 일본특별위원장)에 넘겨 대학가와 시중에 판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1400209201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14&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55&publishType=00020</ref> [[1988년]] [[2월 27일]]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단행된 사면복권에서 특별사면복권 대상자가 되어 풀려났다.
         === [[문민정부]] 시절 ===
  • 공산당 지도 원리 . . . . 2회 일치
         [[공산당]]이 [[혁명]]의 '전위'가 되어, 국가, 정부, 군대, 사법, 종교, 사회단체 등 사회의 모든 요소를 '지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공산당 지도 원리는 공산당을 법률과 정부 위에 놓는 '독재집단'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에서는 민주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헌법에서 '삭제'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 곽결호 . . . . 2회 일치
          | 출생지 = [[대한민국|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환경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환경부 장관]][[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현풍 곽씨]][[분류:대구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
  • 권재진 . . . . 2회 일치
         '''권재진'''(權在珍, [[1953년]] [[7월 27일]] ~ )은 [[대구]]에서 출생한 [[대한민국]]의 [[법조인]] 및 검사이다. 대검차장, 서울고검장,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했으며, [[2011년]] [[8월 12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을 맡아서, [[2013년]] [[3월 11일]] 법무부 장관 퇴임을 했다.<ref>[http://media.daum.net/economic/stock/others/newsview?newsid=20130311184903997 권재진 법무부 장관 퇴임], 뉴스토마토, 2013년 3월 12일</ref>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분류:LS그룹]]
  • 김굉필 . . . . 2회 일치
         [[중종 반정]]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br/>그 결과 [[1517년]]([[조선 중종|중종]] 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증직|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은 [[1519년]](중종 13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화를 받으면서 남곤(南袞<ref>같은 스승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동문이기도 하다.</ref>)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중종 반정 직후부터 계속되어 [[1575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김덕현 (변호사) . . . . 2회 일치
         *1983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판사
         *1998 법무법인 호민 의정부분사무소 변호사
  • 김동명(가수) . . . . 2회 일치
         ||2016년 12월 9일 in 전북 고창, LEGEND||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 8:00pm||
         ||2016년 12월 10일 in 전북 고창, LEGEND||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 5:00pm||
  • 김동석 . . . . 2회 일치
         1920년에 진영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화원청년회 회장을 역임하고 진우연맹을 조직하였다. 한편 [[무정부주의]] 노선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진우연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1927년 6월 대구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석방 후에 고향인 선산군 장천면으로 돌아와 양조장을 경영하였다. 한편 장천금융조합장, 김천청년동맹, 금릉학원 등에 몸담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송금, 비밀 잡지 근우(槿友)의 간행 등과 같은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 김우중 . . . . 2회 일치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인터내셔널|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 김운용 . . . . 2회 일치
         * 1990년 6월 : 대한민국의 [[노태우]]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함.
         * 1996년 8월 :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 교류 대사로 임명됨.
  • 김종훈 (1952년) . . . . 2회 일치
         제8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하여 [[1974년]]에 [[외무부]]에 입부하였다. [[노무현 정부]]부터 [[자유무역협정|FTA]]를 담당하며, FTA 협상 업무를 수행하면서, [[2008년]] 한미 FTA협상을 체결해낸 주역이다. 이후 [[칠레]], [[유럽]] 등과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 본부장을 역임했다.
         [[2010년]] [[12월 13일]] [[한미 FTA]]와 관련된 세미나에서 FTA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농민을 두고 '정부관리를 매수하여 농업보조금을 타는 다방 농민'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주당 부대변인 [[김현 (정치인)|김현]]은 "김종훈 본부장이 숭미사대주의에 빠져 쌀값 폭락과 구제역에 피눈물을 흘리는 농민들의 아픔은 아랑곳 않고 있다"며 "터무니없는 언사를 듣고 있자니 김 본부장이 어느 나라 머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하였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62115 김종훈 '다방 농민' 발언 일파만파] 《노컷뉴스》 2010년 12월 14일</ref> [[진보신당]]도 "통상교섭본부장 그만 두고 다방에서 커피나 마시는 게 더 국익에 도움이 될 것"과 "한미FTA로 인해 고통당할 농민들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공식적으로 비판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141521251&code=940100 김종훈 ‘다방농민’발언에 “다방에나 가라” 역공] 《경향신문》 2010년 12월 14일</ref>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2회 일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 정부와 독일군의 관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 같은 이들이 주장한, 그리고 전간기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지게 된 [[내부중상설]]에 따라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잘못 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독일이 멸망했다'''고 굳게 주장했다. 그리고 황제를 몰아낸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독일 사회민주당]]을 배척했다.
         사민당이 주도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군부의 지지를 크게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군주제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던 독일군은 새롭게 들어선 공화국 정부에 제대로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주요 장성들은 빌헬름 2세의 퇴위와 군주제 폐지를 일시적, 잠정적인 상황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는 군주제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독일 장교단은 기본적으로 군국주의를 추종하여 민주주의와 공화제 정치를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결국 공화정 내에서 연합국 측의 압력으로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자 이를 굴욕으로 받아들이고, 조약의 군비제한을 벗어나 과거의 독일제국군이 복귀되기를 바랬다.
  • 노동기준감독서 . . . . 2회 일치
         [[일본]]의 정부기관, 줄여서 노기(労基, 로우키)라고 한다. [[후생노동성]] 산하의 기관으로서, 노동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에 대하여 지도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분류:일본 정부기관]]
  • 노재우 . . . . 2회 일치
         ** 형님 :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노태우 가]]
  • 동군연합 . . . . 2회 일치
         '''가장 유명한 경우'''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이 아라곤의 왕과 결혼하면서 생긴 연합. 이로서 '스페인 왕국'이 형성되게 된다. 다만, '부르봉 왕조' 집권 이전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포르투갈]](!) 등의 왕국 연합체나 다름없어서(…) 통합은 완전하지 않았다. 부르봉 왕조 이후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지방세력이 갈갈히 찢기고 초토화 되면서 이웃 강국 [[프랑스]]를 등에 업은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권위가 강화된 것(…).
         다만 부부관계는 최악이라 헨리나 엘레오노르 둘다 정부를 거느렸으며, 둘의 불화는 악화되어 헨리가 엘레오노르를 가두기까지 한다. 이에 둘사이에 나온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단체로 대항했으며, 결국 리차드가 헨리를 투옥시키고 잉글랜드 왕위를 상속받으면서 모자동군연합이 됀다
  • 둠 패트롤 . . . . 2회 일치
         정부 및 메타휴먼 히어로 조직이라 할수 있는 ARGUS가 아닌, ARSUS다. 일단 정부 소속.
  • 막부 . . . . 2회 일치
         중국에서 이러한 부의 개설은 반란의 평정이나 대외 원정 등. 중대한 군사 작전 사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일반적인 행정조직으로서는 대응하기 어려워, 장군이 전권을 행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설치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평시 행정조직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중앙 정부에 모든 사안을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일본이 중국에서 들여온 [[율령제]] 체계에서 [[조정]]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막부를 근거로 하여, 이를 상설 통치 조직으로 바꿔서 운용하였던 것이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정부가 있기는 한데 계엄령이 내려져 있고, 계엄령은 무기한이고 범위는 전국(…)이라서 계엄사령관이 사실상 국가의 실권자인 상태가 된 것과 같다.
  • 무법자 . . . . 2회 일치
         무법자라는 단어가 흔히 나오는 것은 [[서부개척시대]]인데, 이 무렵 미국 서부는 미국 연방 정부의 영향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고, 지방 주 정부는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공권력이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무법자들이 각지에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 바실레이오스 1세 . . . . 2회 일치
         아무튼간에 그는 미카엘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얼마안가서 시종장 디미아누스가 해임되고 난뒤 그의 후임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황제의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는데, 여기서 그와 미카엘사이에 살짝 사이에 금이 가는 조치가 내려진다. 바실레이오스는 그의 전처인 마리아와 강제로 이혼하고 미카엘의 정부였던 에우도키아와 재혼하게 된것이다. 이는 유도키아를 다시 황궁안에 들여놓기 위해 미카엘이 취한걸로 보이며, 이걸로 인해 상당한 논란을 낳게 되나, 이는 후술하도록 한다. 이후로 황제는 에우도키아의 보상으로 자신의 누나 테클라를 바실레이오스의 정부로 주기 까지 한다.
  • 박철우(배구) . . . . 2회 일치
         [[1985년]]생으로 [[김요한]]과 나이상 동기지만, 프로 데뷔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은 그가 고졸 자격으로 현대캐피탈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 배구판에서는 20년 전 경북사대부고에서 럭키금성(現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KB손해보험]])으로 직행한 김찬호 현 [[경희대학교|경희대]] 배구부 감독에 이어 2번째인 고졸 현역 데뷔 선수. 가난한 집안 사정과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으로 인해 대학-실업 간 선수 수급에 대한 합의 등이 없던 상황을 이용해 당시 현대캐피탈 감독이자 ~~주로 부정적인 쪽으로~~[[스카우트]]의 귀재인 [[송만덕]]의 아이디어로 프로행을 선언, 초고교급 대어였던 박철우를 잡기 위해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모두 계약을 시도했고, 경쟁의 승리자는 현대캐피탈이 되었다. 학교 지원금(공식적으로 명지대에 일반 학생으로 입학한 케이스)을 포함해 총 '''계약금 8억 원'''을 받고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이것이 대학연맹과 실업연맹 간 갈등 악화를 부채질했고, 결국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이 정상화되었을 때 대학배구연맹은 '''고졸 선수의 프로 직행을 금지하는 조항'''을 프로 연맹에 요청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이후 2013년 드래프트부터 이 조항이 삭제되어 고교졸업 예정 선수들도 드래프트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개정에 따라 지명된 선수가 송림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의 지명을 받아 입단한 [[정지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중대한 결정을 주도한 당시 현대캐피탈 [[송만덕]] 감독은 그 해가 가기도 전에 [[방신봉]]의 항명 파동으로 인해 현대캐피탈 감독직에서 사실상 해임되었다는 것.[* 사실 박철우의 고졸 프로 진출보다 더 파격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1990년대 초반 중학교 졸업 후 [[구미 KB손해보험 스타즈|럭키화재]]에 입단했던 이상욱. 그러나 이상욱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94-1995 슈퍼리그 직전 슬그머니 방출되었다.]
         [[국군체육부대|상무]],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LIG]]와의 경기에서 완벽하게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상무와의 경기에선 범실도 많고 가빈에 비해 안정감을 실어 주진 못했지만 어쨌든 27점이나 올려 줬다. 하지만 LIG경기에선 6득점에 그쳤고 아예 2세트에는 나오지 못했다. 더욱 안습인 것은 작전타임 때 --장인어른-- [[신치용]] 감독에게 이름도 제대로 못불리고 '야 임마!!'라고 불리며 [[유광우]]와 함께 뒤지게 까였다. 여담으로 그 상황에서 [[신치용]] 감독은 세터 유광우에게 "아마추어나 하는 플레이를 하냐?" 라며 깠다.
  • 빅터 차 . . . . 2회 일치
         조지 부시 행정부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또한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in Washington, DC) 한국 석좌로 있다.
         그의 부인은 군인,정치인 김식의 딸이다. 김식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으며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이다. 군에서 소장으로 전역했으며, 11대, 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됐다. 13대에서는 낙선했고, 14대에서는 [[민주자유당]], 15대에서는 [[신한국당]]에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http://ko.pokr.kr/person/1933151 (참조)]] 13대에서 낙선한 이후로 농림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 세종특별자치시 . . . . 2회 일치
         [[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세종특별자치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도시]][[분류:2012년 설치]][[분류:노무현 정부]][[분류:이명박 정부]][[분류:대한민국의 계획 도시]]
  • 스위스 방공호 . . . . 2회 일치
         1959년 3월 24일, 국민투표를 거쳐서 시민방위조항이 헌법에 추가되었다. 이 헌법에 의거하여, 62년에 연방정부가 방공호 대량건설을 법률로 제정하고, 63년 부터 범국민적으로 방공호 건설에 착수하였다. 1963년 10월 4일, 민방위법에 따라서 새 건물을 지을때는 핵 방공호 건축이 의무화 되어 있고, 방공호를 짓지 않는 경우에는, 행정 당국에 1.5실당 약 1300달러를 납부하고 대신 공용 방공호 시설을 할당 받도록 되어 있다.
         2005년 스위스 의회는 건설 의무 조항을 폐기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였으나, 정부는 테러 집단이 핵무기를 쓸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기존의 정책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 시장경제지위 . . . . 2회 일치
         특정한 국가의 원자재, 제품 가격, 임금, 환율 등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정부의 간섭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경제 체제를 갖추었다고, 교역 상대국이 인정해주는 지위를 뜻한다.
         정부의 간섭으로 제품 가격을 조정하여 저렴한 가격에 수출할 경우, 수입국의 해당 산업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가격 차별로부터 제품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반덤핑 규제를 받기 쉽다.
  • 아웃워드 작전 . . . . 2회 일치
         1940년, 대규모 돌풍이 불어서 많은 양의 방공기구가 해방(?)되었다. 이 방공기구들은 동쪽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북해]]를 건너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날아가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전선과 라디오 방송국 안테나를 덮쳤다. 스웨덴 정부는 영국 정부에게 이 사태에 대해 항의했다.
  • 원피스/838화 . . . . 2회 일치
          *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소수로 정부의 수배서 조차 가짜의 얼굴이 올라있다. 크래커는 이 가짜들을 즉석에서 여러개 만들어 "병사"로 사용한다.
          * 정부에서 발행한 수배서 조차 갑옷의 모습이 올라가 있다.
  • 원피스/840화 . . . . 2회 일치
          * 그때 베가펑크는 생물의 "혈통인자" 즉 유전자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세계정부에게 적발된다.
          * 그들은 연구결과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 베가펑크를 체포되고 연구팀은 정부에게 매수되었다.
  • 음모론 . . . . 2회 일치
          * 프리메이슨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비밀 단체로, 미국 정부는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영국 침공 계획을 세웠다.
          * 천안함은 이스라엘 모사드 잠수함과의 충돌로 침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 의성군 . . . . 2회 일치
         국내 컬링계는 현재 [[경기도]]와 [[경상북도]]가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경기도(의정부)는 엘리트 체육, 경북(의성)은 생활 체육 기반이라는 점도 대비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북의 실업팀은 남녀에 믹스더블까지 있는 반면, 경기도의 실업팀은 여자팀만 있지만.] [[경기도청 컬링팀|경기도청]] 선수들도 마땅히 연습할 시설이 없어 '''의성에서 훈련한 뒤에 의성에서 경기를 치를 정도'''였다. 2018년 [[의정부컬링훈련장]]이 완공됐고 그에 앞서 [[진천선수촌]] 컬링장도 완공됐지만[* 다만 진천은 국가대표팀의 훈련용으로 사용된다.], 이미 의성의 [[경북컬링훈련원]]은 [[카자흐스탄]]이나 [[몽골]] 등 비교적 컬링 역사가 짧은 아시아의 대표팀이 찾아와 훈련할 정도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컬링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도 의성에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2423&cid=51938&categoryId=54649|의성 마늘배 전국 컬링 대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컬링 보급에 힘쓰고 있다.
  • 이각종 . . . . 2회 일치
         [[1920년]] 6월 병으로 군수직을 사임하였다. [[1921년]] 병에서 회복된 뒤 조선총독부 내무국 제2과 촉탁으로 부임했다.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촉탁으로 활동하는 한편 강연을 하고 글을 발표하면서 [[황민화 정책|황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 1928년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1937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있을 때 [[황국신민서사]]의 문안을 만들었다.<ref>{{서적 인용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6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계순 (1927년) . . . . 2회 일치
         [[분류:192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문학자]][[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분류:여자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정무제2장관]][[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산하(시인) . . . . 2회 일치
         1987년 3월에는 「녹두비평」이라는 잡지에 [[제주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발표했다가 [[필화]]를 겪었다. 그는 [[4.3]]을 접하면서 4.3 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자료집 <제주도 피의 투쟁사>[* 사실 이 책은 [[좌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김봉현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사실 4.3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던지라 이런 자료들을 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를 출판사를 통해 비밀리에 접하고 이를 토대로 시를 썼다. 하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강력한 표현[* 시에서 드러나는 [[반미]]적 표현과 [[빨치산]]을 미화하는 듯한 표현들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작가와 평론가들도 그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하는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며 그들에게 섭섭함을 나타냈다.] 때문에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그는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반공주의|반공 이데올로기]]와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다가 "[[가즈아|던지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1,2절을 그대로 적어냈다고 한다. 그러자 [[변호사]]는 물론이고 [[법원]]과 [[검찰]]마저 발칵 뒤집어져, 당시 담당 [[검사(법조인)|검사]]였던 [[황교안]]은 '''"영원히 콩밥 먹게 해주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외면받았지만 국외에서는 이산하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관련 인사가 미국 펜클럽 회장이자 <[[타인의 고통]]>의 저자인 [[수전 손택]] 여사였다. 그녀는 1988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투옥시킨 [[노태우]] 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이 일로 그는 10여년 동안 절필한다.
  • 이열희 (1924년) . . . . 2회 일치
         [[1961년]] [[6월 6일]] 전임강사에서 조교수로 승진하여 [[경북대학교]]로 정식 발령<ref>"정부인사", 경향신문 1961년 06월 06일자 1면 정치면</ref>, 경북대 치의학과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1962년]] [[11월]] 오재인(吳在仁), 정순경(鄭淳慶), [[국군통합병원]] 의무과장 최형곤 [[대령]] 등과 함께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972년]]부터 [[1976년]] [[11월]]까지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동시에 그는 무의촌대책위원회 치과분과 회장을 맡으며, 병원, 의료시설이 없는 무의촌의 치과 진료 봉사에도 참여하였다.
         치과의사가 부족하여 무허가 불법 치과의료 시술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증가하자 그는 각 의과대학 내 치과 설치 증설과 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외국의 인구 대비 치과의사 수를 확인하고 정부에 치과의사 양성이 필요함을 꾸준히 설득했다. [[1973년]] 전국 7개 지방 국립대에 치의학과, 치의예과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
  • 이인영(정치인) . . . . 2회 일치
         19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통령선거 직선제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노태우]]의 항복선언을 받아내자,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 중심으로 [[전대협]]을 결성하여, 1987년 7월 대전 충남대에서 출범식을 거행하였다.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현행법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보조금의 경우 보조금이 지급되는 대상 사업의 범위와 기준보조율을 대통령령에 위임하고 있으나, 중앙 및 지방정부의 예산규모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항인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 범위와 각 사업별 국고 보조율은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임. 한편, 양로시설을 제외한 노인시설 운영사업은 보조금 지급을 제외하고 있음. 그런데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노인시설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종교시설에 설치된 노인시설에 대해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비를 일부 지원하여 종교시설 유휴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노인복지를 증진할 필요가 있음. 주요내용 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보조금의 경우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 지급 제외 사업, 각 사업별 기준보조율을 법률로 상향규정함(안 제9조제2항?별표 1?별표 2 신설). 나. 종교시설에 설치된 노인시설 운영사업을 보조금 지급 대상 사업에 포함함(안 별표 1 제122호 신설)]
  • 이종희 (1942년) . . . . 2회 일치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겉보기에는 무척 부드러워 보이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매사에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는다. [[대한항공]]이 사업정상화를 위해 제트기를 새로 도입할 당시 신입직원이던 이종희는 영어로 된 부품과 정비매뉴얼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밤을 새워가며 정비매뉴얼을 완벽하게 번역하면서 오너로 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영업부에서 항공기 운항과 정비 등의 운항 종합정보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 5년간 휴일을 포함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을 지켰다는 일화는 지금도 사내에 회자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한 · 프랑스 협력에 앞장서고 세계 항공시장에서 양국 간 경제협력과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이종희에게 프랑스 정부 최고 훈장인 레종 드뇌르 슈발리에(La Legion d'honneur Chevalier) 훈장을 수여하였다. 레종 도뇌르 훈장은 ‘영광의 군단’이란 의미를 지닌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데 레종 도뇌르는 일반적으로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 등 3개 등급으로 구분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004년]] 이 훈장 가운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인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를 받은 바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12408021|제목=이종희 대한항공 사장‥40년 한국 민항 역사의 산증인|날짜=2009-11-25|출판사=한국경제|확인날짜=2010-04-12}}</ref>
  • 이주호 (1961년) . . . . 2회 일치
         '''이주호'''(李周浩, [[1961년]] [[2월 17일]] ~ )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청구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코넬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대한민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인종개량 . . . . 2회 일치
         일본인의 의식주의 개선을 통한 환경개량은 괜찮은 호응을 얻었을지 몰라도 타카하시 요시오가 주장하는 서양여자를 수입해와 잡혼을 통해 혼혈로 일본인종을 개량하자는 주장은''' 당시에도 극단적인 개소리로 취급됐고, 단 한번도 일본정부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행된적이 없다.''' 애시당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일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사실이다.
         이후 일본정부는 야마토 정신을 가진 [[야마토 민족]]이 가장 우월하고 [[귀축영미]]는 정신과 사상이 썩어빠진 놈들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며, 일본민족이 가장 우수하므로 귀축영미로부터 아시아를 지켜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에 심취한다.
  • 장기오 (공무원) . . . . 2회 일치
         [[대한민국 육군|육군]] [[3성 장군|중장]] 예편 이후 [[대한민국 총무처|총무처 장관]]을 역임하였고 [[1996년]] 12·12 군사 반란이 [[문민 정부]]에 의하여 사법처리가 확실시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7년 12월 22일 12·12 군사 반란 가담자가 사면된 뒤 대한민국과 미국의 범죄인 인도 협정이 발효될 예정을 보이자 [[1998년]] 귀국해 자수했다.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인동 장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나회]][[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서울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 절대가련 칠드런/449화 . . . . 2회 일치
          * 때마침 효부를 추적해온 정부군의 병력이 들이닥치고 효부는 시로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데.
          * 정부군의 헬기인데 사실 조종하는 것은 "블랙 팬텀"
  • 절대가련 칠드런/469화 . . . . 2회 일치
          * [[머슬 오오카마]]가, 로비에트 정부에도 [[길리엄(절대가련 칠드런)|길리엄]]의 마수가 뻗어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했다고 알린다.
          * [[머슬 오오카마]]가 효부의 부상 소식에 사색이 돼서 달려온다. 효부에게 자신의 심장을 바칠 테니 써달라는 참 갸륵한 말을 하지만 역시 머슬이 하는 소리라 그런지 효부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거절한다. 머슬은 로비에트 정부가 블랙팬텀에 넘어갔는지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제 대사직도 없어진 자신이 조직에 헌신하는건 그런 것 정도라고 말하지만, 효부는 그 제안에 심전도가 떨어질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켜서 결국 보류된다.
  • 정경식 . . . . 2회 일치
         1937년에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정경식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송종의 전 대검 차장 등과 함께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박정희 정부]]와 [[5공화국]]에서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공안검사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재직하던 1979년 10월 27일에 [[10.26 사건]]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되어<ref>경향신문 1979년 10월 27일자</ref> [[12.12 사태]]로 연행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조사하는 등 [[5공화국]] 출범 때인 서울지검 특수2부장으로 있던 1980년 5월말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사회정화위원을 했다. 1983년 8월 12일에 서울지검 3차장 검사를 거쳐 부산지검장에 재직하던 1992년에는 지역감정 조장과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논란을 부른 [[초원복집 사건]]에 연루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 직후에 "송종의, 최명부 검사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서 가혹행위를 했다"며 "검찰 요직에 임명해서는 안된다"는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의 주장<ref>매일경제 1993년 9월 18일자</ref>에 의해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전보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으나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청주지검장, 대구고검장 등을 역임하다 검찰 출신으로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7569.html]</ref>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1994년 9월 16일에 "유신체제 아래에서 공안검사로 있으면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1979년 7월 23일 국회 본회의 발언을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게재한 민주전선 주간인 [[문부식]]<ref>동아일보 1979년 7월 31일자경향신문 1979년 7월 31일자 8월 18일자</ref>과 <어떤 조사>를 쓴 [[한승헌]] 변호사<ref>동아일보 1975년 8월 28일자</ref>, 우도 간첩 사건<ref>동아일보 1973년 7월 3일자</ref>, 교포학생 김승효, 삼천포 간첩단 사건, 예비역 장교 등에 의한 내란음모사건<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131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1-31&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10&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5년 1월 31일자</ref>, [[통일혁명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을 수사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인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많은 시민과 학생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신군부]]의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에서 공무원을 정화하는 등의 민권억압을 한 전력이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2000329201009&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3253&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88년 10월 20일자]</ref>며 "자진 사퇴하라"는 비판을 받았다.<ref>한겨레 1994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1995년 11월 28일자</ref> [[박정희 정부]]에서 시국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구속자 가족들이 정경식 검사를 향해 야유를 보내면 검사석에서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초리로 방청석을 노려보곤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140028910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6-14&officeId=00028&pageNo=5&printNo=1589&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3년 6월 14일자]</ref> 1999년 2월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전년 대비 "8천902만원이 늘었다"고 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18788]</ref> 1980년 [[5·16민족상]] 안전보장 부문 후보자로 선정됐다.<ref>동아일보 1980년 5월 9일자</ref>
  • 정난정 . . . . 2회 일치
         윤원형이 이조판서에 오를 때 정부인으로, [[의정부]] [[우의정]]과 [[영의정]]에 오를 때에는 [[정경부인]]으로 작호가 올랐다. 정경부인으로 오른 후 궐에 자주 들어 [[조선 명종|명종]]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 정재호 (1964년) . . . . 2회 일치
         |경력 = [[한국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br />[[노무현]]대통령후보 정무보좌역<br />[[참여정부]] (대한민국, 2003년~2007년)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사회조정비서관,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br />
         정재호는 1998~2001년 [[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 故 [[노무현]] 대통령후보 시절 정무보좌역, 2003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2005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2006년 [[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비서관과 2007년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등 [[정무직]] 공무원직을 수행했다.
  • 조원진 . . . . 2회 일치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폭로한 9명의 [[친박]]의원 모임의 일원이다. 이른바 '''친박 9인회'''.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서청원]], [[최경환(1955)|최경환]], [[윤상현(정치인)|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정치인)|홍문종]], [[유기준(1959)|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정치인)|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http://h21.hani.co.kr/arti/politics/42751.html|전해준다고 하였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박사모|박근혜 즉각 석방]], [[박근혜 탄핵]] 주동자 심판, [[언론통제|언론에 대한 강력한 제재]], [[5.18 민주화운동/왜곡|5.18유공자 전수조사]], [[호모포비아|동성애 금지]], [[박근혜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국정교과서]] 의무화[* 그러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국정교과서는 사형선고를 받게됐다.], 20억 이하 재산 상속세 증여세 완전 폐지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박근혜의 석방만 외쳤을 뿐 대통령직 복권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지지율은 1% 안팎이다.
  • 창원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정부(1942)|김정부]] - 마산합포구
  • 창작:왕국 . . . . 2회 일치
         || 정부수반 || 엘리엇 입스위치 총리(Elyot William of Ipswich) ||
         남부에서는 가끔씩 모래폭풍이 불어 재산 및 인명 피해를 입히기도한다. 이를 예측하기 위해 "폭풍 감시원"이라는 직업이 있는데 모래폭풍을 관측해 방향, 규모, 속도 등등을 무전으로 보고하는 직업이다. 정부는 이들을 영웅으로 선전하지만, 실제 대우는 좋지 못한 편이다.
  • 창작:좀비도시 . . . . 2회 일치
         '''정부'''
          * 시정부 : 현재 다른 도시로 대피한 상태. 이재민 대표 격이 되었다.
  • 청년 튀르크 당 . . . . 2회 일치
         결국 청년 튀르크 당은 술탄 통치를 무너뜨리고 입헌 정부를 수립했다. CUP는 1913년이 되자 새 지도자들 하에서 오스만 제국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입헌 정부를 주도한 청년 튀르크 당은 각종 행정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는 한편, 여성 교육과 의무교육 제도를 개선하였고, 공업화 추진 등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 최광식 . . . . 2회 일치
         '''최광식'''(崔光植, [[1953년]] [[5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이며,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경주 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문화재청장]][[분류: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2회 일치
         ==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계 블랙리스트]] 관여 ==
         국정원 제2차장 시절에 '국정원 문화·예술인 배제 보고서'를 수차례 보고 받고 지시하는 등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우병우 전 수석에게 ‘비선 보고’하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24444379242d545ae3e855a102f4499|#]] 그러한 이유로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2017년 12월 2일 [[오민석(법조인)|오민석]] 부장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물론 검찰 내부에서는 최 전 차장의 구속영장이 '가담 정도'를 이유로 기각된 것에 불과하고 범죄 사실 소명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731.html#csidxe6517123a8063c9aaa12e8244fa6d69|#]]
  • 최창홍 . . . . 2회 일치
         [[1937년]] [[2월 20일]]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된 뒤부터 군용 자동차 징발 및 운전수 징집, 지하자원 개발 및 공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및 검거, 국내 물자 조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8년]]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간사를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분류:1903년 태어남]][[분류:1951년 죽음]][[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카치구미 . . . . 2회 일치
         적대국 국민으로서 브라질 정부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일본계 이민자들은 '일본의 승리'만이 이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튼 카치구미의 테러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식파 인사들 만이 아니라 미국 국무부, 일본 정부, [[GHQ]] 등에서 카치구미를 열심히 설득하였고, 일본 국내에서는 브라질에 친구와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라는 호소가 퍼졌으며, 일본의 현재 영상을 브라질에 보내기도 했다.
  • 코미디언(왓치맨) . . . . 2회 일치
         16세였던 1939년부터 뛴 고참 히어로. 초능력은 없지만 뛰어난 육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1977년 비정부 히어로의 활동을 금지하는 킨 법령이 발효된 이후에도 미국 정부를 위해 히어로 활동을 하였다.
  • 콩고(소설) . . . . 2회 일치
         그렇지 않아도 일본과 유럽 합작 기업의 탐사대가 추격 중이라 바짝 긴장한 연구소는 급히 과학자 카렌 로스를 팀장으로 삼아 소규모 탐사대를 재차 투입한다. [* 이렇게 급하게 탐사대를 다시 꾸린 건 경쟁 기업의 추격도 있었지만 해당 지역이 정부군과 식인종 키가니족이 내전 중이라 어렵게 따낸 탐사 허가를 또다시 따낼 틈이 없어 일단 탐사대의 전멸은 비밀로 한채 새로운 탐사대를 투입하는 걸 들키기 전에 얼른 투입시키기 위해 서둘렀다.] 영상에 집힌 고릴라의 이미지 때문에 영장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카렌은 수화를 할 줄 아는 [[고릴라]] 에이미와 그녀를 돌보는 동물학자 피터 엘리어트, 아프리카의 백인 용병 찰스 먼로 등이 이끄는 탐험대가 자이르 정글 깊숙한 곳으로 잃어버린 전설의 다이아몬드 광산도시 진즈(Zinj)를 찾는 모험이 중심 소재이다. 마치 전형적인 모험 소설 같지만, 탐험의 주체가 현대적인 광산 기업이거나, 위성으로 연락, 데이터를 컴퓨터로 분석하거나 NASA에서 개발된 탐험 장비를 사용하는 등 상당히 현대적인 가제트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정글에 투입시 지대공 미사일의 공격을 시작으로 식인종의 식인 행위를 목격하고[* 창칼로 무장한 원시인 수준이긴 했지만 너무 호전적이라 닳고닳은 용병인 먼로도 경계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정부군이 멀쩡한 건 아니라 수틀리면 간빼먹는 건 일도 아니게 생각할 병사들이 그득하다고.] 하마의 공격에 혼쭐나기도 하고 피그미족에게 구출된 1차 탐사대원도 만난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한마디도 못하는 폐인이 된 상태였지만 에이미의 냄새를 맡자 극도로 흥분한다. 이들이 당했던 일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복선.] 일본, 독일, 네덜란드의 합작 기업을 추격하지만 결국 그들이 먼저 도착했다는 연구소의 소식에 좌절하고 일단 가는데까지 가보자며 털레털레 가지만 정작 추락한 합작 기업의 수송기에 실린 물자는 그대로고 곧이어 찾은 합작 기업의 탐사대 캠프 역시 전멸당한 상태였다.
  • 트로피코 4 . . . . 2회 일치
         이들의 습격이 시작되면 병사, 장군, 대통령 각하가 반란군에 맞서 싸운다. 전투는 어느 한쪽 모두가 죽거나 도망칠 때 까지 지속된다. 정부군이 승리하면 별 탈 없이 끝나지만, 반란군이 승리할 경우 습격당한 건물이 폭파된다. 대부분의 경우 다시 지으면 되지만 대통령 관저가 폭파되면 게임오버.
          * 1976-1979: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범죄자 추방 - 매년 범죄자들이 섬에 도착함
  • 트로피코 4/인물 . . . . 2회 일치
         국방부 장관을 임명하라는 제안을 할 때 대사를 보면 계획이 있다. "자유주의자 녀석들이나 범죄자, 그리고 짜증나는 청소년 녀석들을 쏴죽이는 계획"이. 이후에는 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축할 생각으로 보인다.
         캠페인에서 영국 정부가 반대하는데도 무명의 섬을 냅다 영국 식민지로 만드는 걸 보면 한가닥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막장 블랙코미디물이라 그런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 팽정광 . . . . 2회 일치
         '''팽정광'''(彭正光, 1955년 ~ )은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근무하고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관료]], [[기업인]]이다. 현재는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이다. 본관은 [[용강 팽씨|용강]]
         * 2010년 2월 :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 취임
  • 하쿠다 켄 . . . . 2회 일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백남준]]의 큰형이자 당시 [[대한민국]] 최대의 섬유 기업 태창방직(방림방적의 전신)의 회장이었던 백남일의 장남으로 '''백건'''(白健)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일가족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태창방직이 [[대한민국]] 정부에 몰수당하게 되자 부모와 일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 귀화하여 이 때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쿠다 켄(白田健)으로 개명하고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79539 백남준 대리인측 "정부 기념사업 협의없이 진행"], 《[[경인일보]]》 2011년 5월 4일자
  • 한상대 (검사) . . . . 2회 일치
         한인대는 사찰총장 취임사에서 "오늘 검찰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땅에 3대 전쟁을 선포하고자 한다"며 "하나는 부정부패와의 전쟁이고, 둘째는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이며, 마지막으로는 우리 내부의 적과의 전쟁"이라고 '전쟁'이란 표현을 연거푸 사용했다. 또한 "이 땅에 북한 추종세력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응징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통일 기반을 마련하는 첩경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공안역량을 정비하고, 일사불란한 수사체제를 구축하여 적극적인 수사활동을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종북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는 결코 외면하거나 물러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북한을 추종하며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집단을 방치하는 것은 검찰의 직무유기"라고 덧붙였다.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0657 "한상대의 '전쟁 선포'... 박영선이 옳았다"] 《오마이뉴스》 2011년 8월 13일 박주현 기자</ref> 경향신문은 칼럼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인도적 대북 식량지원을 촉구했습니다. 반 총장은 종북좌익세력인가요, 아닌가요. 노동, 경제, 반(反)복지 정책 등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면 누구는 괜찮고, 누구는 종북세력입니까"라며 한상대의 발언을 비판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51805021&code=940301 검찰과의 전쟁] 경향신문 2011년 8월</ref>
  • 한창수 . . . . 2회 일치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대한제국 순종|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
  • 해양군 . . . . 2회 일치
          | 배우자 = 정부인 [[순흥 안씨]] <br /> 계부인 [[광산 정씨]] <br /> 제2계부인 [[한산 이씨]] <br /> 제3계부인 [[덕수 이씨]]
          | 부모 = [[흥안군 (1598년)|흥안군]](양부) <br /> 흥안군 계부인 [[파평 윤씨]](양모) <br /> 흥안군 정부인 [[청주 한씨]](양전모) <br /> [[인성군]](생부) <br /> 인성군부인 [[해평 윤씨]](생모)
  • 해원군 . . . . 2회 일치
          | 매장지 = {{KOR}} [[경기도]] [[의정부시|의정부]]
  • 허화평 . . . . 2회 일치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국책연구소인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에 부임하였다.
         5공시절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매우 적은 데 반해 허화평은 방송 등 언론 노출 빈도가 높은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쾌도난마(채널A)|쾌도난마]]에 출연해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문고리 3인방|권력의 문고리만 잡으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라며 ~~문고리 잡아본 사람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홍명희 . . . . 2회 일치
         그리고 1919년 괴산에서 [[3.1 운동]]에 참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을 보고 왔으며[* 이 당시 이광수와 친해졌다. 이때 벽초는 이광수에게 톨스토이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고 여운형 암살 후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나 환경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이후 월북했다. 월북 계기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그의 월북 동기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근데 [[김일성]] 정권도 핵심 실무인력에서는 친일 청산 안했잖아?~~
  • 홍석형 . . . . 2회 일치
         '''홍석형'''(洪錫亨, [[1936년]] [[10월 1일]] ~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었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1936년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금속공학 학위를 받았다. 성진제강소 기술부기사장, 금속공업부 제1부부장, 김책제철련합기업소 기사장, 함북도당 제2비서 겸 김책제철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 국가계획위원장([[1993년]]~[[1998년]]<ref name="ab" />), 함북도당 책임비서([[2001년]]~[[2010년]]<ref name="ab" />), 당중앙위원회 부장을 지냈다.<ref name="tongilnews">{{웹 인용|제목= 당대표자회, 40년대 해방전후 차세대 기수 전면 등장 |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72 |저자=정명진 |출판사=통일뉴스 |날짜=2010년 9월 29일 |확인날짜=2011년 10월 4일}}</ref> 그리고 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있다.
  • 홍승목 . . . . 2회 일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의 찬의가 되어 [[1921년]] 관제 개편때까지 재직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도 서훈 받았다.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영식 . . . . 2회 일치
         [[1883년]](고종 20년) [[6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의 사절이 [[한성부]]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그해 [[6월]] [[미국]]의 사절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정부에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될 때 그는 보빙부사 겸 전권부대신에 임명되어 보빙사 겸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6월 5일]]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출국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왕과 왕비는 [[경우궁]]으로 피신하고, 수구파 대신들은 왕명으로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진 뒤 살해되었다. 고종과 민비 내외를 호종하던 그는 정변이 성공하자 친위영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포장(右捕將)에 임명되었다가, 곧 갑신 내각의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 만에 진압되고 만다.
  • 효령대군 . . . . 2회 일치
         ** 정부인 :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藝城府夫人 海州 鄭氏, 1394~1470)
         [[보성군]]의 증손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는 생전에 용강현령,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지만 다시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贈) [[호조]][[참판]],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영의정]]으로 여러 번 증직을 받았다. [[전성군 (1488년)|전성군 이대]]의 아들이 [[이량 (조선)|이량]]이고, 딸 부부인 이씨는 청송 심씨 [[심연원]]의 아들 [[심강]]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딸이 [[인순왕후]]로 [[조선 명종|명종]]의 비가 된다. 아들은 [[심의겸]]과 [[심충겸]]으로, [[심의겸]]은 [[서인]](西人)의 초대 당수가 된다.
  • Crusader Kings 2/DLC . . . . 1회 일치
         유목정 정부체제를 추가하는 DLC.
  • Crusader Kings 2/종교 . . . . 1회 일치
         게임 Crusader Kings 2의 종교를 설명하는 페이지. 중세 배경인 게임인 만큼 종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몇몇 종교의 경우에는 정부 형태를 강제하기도 하니 더더욱 중요하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기술 . . . . 1회 일치
          잠수정부터 현대식 잠수함까지의 잠수함, 기본 대형 잠수함에서 개선된 대형 잠수함까지의 대형 잠수함에 대한 연구. 외전격인 Super Heavy Submarine 외에는 잠수함을 연구하면 대형 잠수함도 함께 해금된다.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 Europa Universalis 4/공략/아시아 . . . . 1회 일치
         이게임시작지점에서 가장 많은 땅덩어리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높은 총개발도(developement)를 지닌 국가. 상당히 많은 고유시스템을 들고있는데, 고유 팩션인 천조국 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관료, 사원, 환관이 행정, 군사, 외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각 팩션의 영향력이 가장 높을경우 그 팩션이 보너스를 주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유 정부체제인 천조국(Celestial Empire)체제를 지니고 있는데, 기술비용과 안정도 비용을 10%줄여주며, 모든 땅의 수입이 반이된다. 천명이란 시스템으로 반란도를 5줄여준다. 만약에 정통성이 70이하이거나 안정도가 음수가 될경우엔, '천명을 잃음'이 뜨면서 천명의 보너스가 사라지고 반란도가 5상승해 최종적으로 반란도 10이 늘어난다(...) 거기다가 중국계 문화권이 엄청 세분화되어 천명한번 터질경우엔 오나라, 촉나라, 연나라, 제나라등 소국들이 죄다 반란일으키고 독립해 춘추전국시대를 만들기도 한다...~~안습~~ 내적 완결성등 명한테 들어있던 수많은 디버프들이 전부 사라져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여전히 천명이란 고유시스템덕에 빵빵터지는 반군들을 맛볼 수 있다(...)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서구화를 하도록 하자
  • Victoria II/POP . . . . 1회 일치
          * Militancy(투쟁성): 해당 POP가 얼마나 빡쳐있는지의 정도. 화염으로 표시된다. 이게 높을 경우 반란을 일으키거나 다른 나라로 탈출할 확률이 높아진다. 지지하는 운동이 무시당하거나, 주류 민족이 아니거나, 여당이 마음에 안 들거나, 어쨌건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증가한다. 또한 자국이 열강에서 탈락할 경우에도 쪽팔려서 증가한다.
  • Victoria II/개혁 . . . . 1회 일치
          * 지하 정당: 정부가 야당들의 공개적인 행동을 금지한다.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문화 . . . . 1회 일치
         === State & Government(국가 & 정부) ===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상업 . . . . 1회 일치
         === Government Interventionism(정부 개입주의) ===
  • 가석방 . . . . 1회 일치
         아래 사이트는 '''정부기관 사이트 답게''' 대뜸 키보드 보안 설치를 강요하므로 주의.
  • 강연재 . . . . 1회 일치
         | 사진설명 = 강연재 "문정부 빨갱이 아니길 진심을 빈다" 막말 논란
  • 강우영 . . . . 1회 일치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1950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대구지검,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61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을 하다가 1961년 서울고검 검사, 1962년 부산지검 부장검사, 1966년 전주지검 차장검사 1968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1970년 부산지검 차장검사를 하였으며 1971년에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장이 되었다. 지청장 임기를 마친 이듬해 서울고검 차장검사를 하다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 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전주지검 검사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 검사장, 법무부 법무실장을 하는 등 박정희 정부에서 법무부와 검찰 주요 요직을 거쳤다. [[전두환]] 등 신군부 집단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198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22대 서울지검장을 하고 1981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재직중인 1981년 4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기 5년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대법관에 재직중이던 1984년 7월 제6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대법관 퇴임이후인 1987년에는 대한공증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강재형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2001년]] ~ [[2013년]] :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 위원
  • 강중인 . . . . 1회 일치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토지문제연구위원에 임명되었고, 미군정 과도정부의 사법부 총무국장도 지냈다. 같은 해 7월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여 남로당과 미군정이 정면 충돌을 일으켰을 때 위폐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남로당은 곧 불법화되었고, 강중인은 [[1949년]]에 발생한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 경대수 . . . . 1회 일치
         [[2017년]] [[8월 10일]]에는 [[문재인 정부]]의 군복무기간 단축 정책에 대응하여 대통령이 군 복무기간을 조정할 때에는 [[국회]] 상임위에서 공론화를 거치도록 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위의 내용과 대비해서 보면 묘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경산시 . . . . 1회 일치
         * [[최경환 (1955년)|최경환]] - 현 경산시 국회의원(4선,[[새누리당]]),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 곽상도 . . . . 1회 일치
         2008년까지 검사로 활동했다가 퇴직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청와대 민정수석|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고,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맡았다.<ref>연합뉴스《무죄확정 '유서대필 사건' 수사 검사들은 '승승장구'》2015년5월14일</ref> 제20대 국회의원이다.
  • 곽승준 . . . . 1회 일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위 인수위원을 지내며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실(현 [[대통령비서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 등을 지냈다.
  • 광주 FC . . . . 1회 일치
         광주 FC의 창단은 1996년 월드컵경기장 유치과정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02 월드컵 개최지로 한국과 일본이 선정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월드컵경기장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광주광역시가 개최도시 중 하나로 선정될 수 있었다.
  • 권영해 (1888년) . . . . 1회 일치
         *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3월 1일을 기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권혁세 . . . . 1회 일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공공기관에 대한 ‘MB 정권’의 낙하산 인사와 관련해 문제를 지적하여 청와대는 국정 철학 공유라는 주요기관장 교체 원칙을 밝혔으며 박근혜정부 출범직후 임기1년을 남기고 금감원장에서 자진사퇴하였다.
  • 기동전사 건담 실루엣 포뮬러 91 . . . . 1회 일치
         제브라 존의 폐기 콜로니에 숨어사는 네오지온의 잔당. 연방정부에 그 존재는 일단 인식되고 있으며, 생존권은 보장되고 있다.
  • 김기철 . . . . 1회 일치
         [[일제강점기]] 일본 간사이 대학 전문부를 수료하였다. 이후 만주국 길림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로 근무였다. 한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 김대환 (법조인) . . . . 1회 일치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2년 10월 2일에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홍사덕]] 후보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흑색 선전물을 살포하다 1심에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를 선고받은 안기부 대공수사국 소속 한기용(37세) 사무관과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박재규(29세) 김일환(32세) 전우경(27세) 등 4명에게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대공 수사관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음지에서 성실히 일해온 모범 공무원인데다 유죄판결로 공무원 자격 박탈되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원심대로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2년 10월 2일자</ref> 1993년 2월 26일 [[5공화국]] 비리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은 전 치안본부 정보1과 분실장 서정희(48세 당시 청와대 정부수석 비서관실 파견)에 대해 혐의사실 중에 일부만 유죄를 인정하여 선고유예 판결했으며<ref>동아일보 1993년 2월 26일자</ref>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은폐, 조작하여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65세)에게 범인도피죄를 적용해 1심대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 김동건 (법조인) . . . . 1회 일치
         1997년 서울민사지방법원 1979년 [[대전지방법원]] 1981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1982년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1985년에 댑덥원 재판연구관을 하다가 1987년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1989년 사법연수원 교수 1992년 법원행정처 조사국장을 하였지만 1991년 서울형사지방법원, 1993년 대구고등법원, 1994년 대구지방법원, 1995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심리하였다. 1997년에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하였으며 2000년에 제주지방법원장에 임명되어 2004년 2월 서울고등법원장이 되기 까지 수원지방법원, 서울지방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 2월 서울고등법원장에서 물러난 이후 법무법인 바른 대표 변호사와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장, 참여불교재가연대 대표를 맡다가 2007년 11월에 임기 2년의 제11대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09년 9월에는 제3기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하다가 2012년에 법무법인 바른 명예대표 변호사ㄱ,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를 지내면서 2017년 2월에 법무법인 천우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 김문집 . . . . 1회 일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일본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
  • 김상중(배우) . . . . 1회 일치
         || '''출생''' ||<(> [[1965년]] [[8월 6일]] [*음력] ([age(1965-08-06)]세), (정부 직할) [[전라북도]] [[완주군]] [* 현 전라북도 완주군. 전북 태생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라북도 무주군(현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자랐다.] ||
  • 김성곤 . . . . 1회 일치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김성훈(배우) . . . . 1회 일치
         * 《가정부 옥희님》 (2013년) - 휘이재 역
  • 김숙자 (1389년) . . . . 1회 일치
         [[증직|증]]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가, [[1845년]](헌종 11) [[의정부]][[영의정]] [[권돈인]]의 추증 및 시호 하사 건의로 [[증직|증]] [[이조판서]] 겸 좨주(吏曹判書兼祭酒)에 가증되었지만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1871년]](고종 8) [[3월 16일]] 왕명으로 문강공(文康公)의 [[시호]](諡號)가 [[추증]]되었다.
  • 김옥이 . . . . 1회 일치
         '''김옥이'''(金玉伊, [[1947년]] [[12월 2일]] ~ )는 여군 출신의 정치가이자, 준정부기관인이다.
  • 김장섭 . . . . 1회 일치
         [[8.15 광복]] 이후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 대검찰청 검사를 거쳐 [[변호사]]를 개업했다.
  • 김중로 . . . . 1회 일치
         2017년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하얀 머리 멋있습니다. 여자분들이 지금 백색 염색약이 다 떨어졌답니다. 그렇게 인기가 좋습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외교가 그렇게 잘 돼야지요."라고 발언해 그 자리에서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여당 의원들의 거센 항의와 사과 요구를 받았지만 '뭘 사과하란 말이냐'라며 일축하더니 '''[[http://v.media.daum.net/v/20170912200106124|시간 없으니까 그냥 들어가라며 정책 관련 질의를 아예 하지 않아]]''' 여성 비하라며 더욱 거센 항의를 받았으나 '뭘 앉아서 사과하라고 하나, 여성비하 안 한다'라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사과 요구도 있었다.
  • 김처선 . . . . 1회 일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복권되기에 이르지만 [[중종(조선)|중종]]은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던 듯 싶다. "김처선은 술처먹고 주정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어서인지 중종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사림들의 상소를 모두 무시한다. [*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04_002]] ]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1화 . . . . 1회 일치
          * 코스튬의 개량도 만만한 일이 아닌데, 기본적으로 라이센스가 있어야 하며 세세한 수정 사항에 대해선 문서로 기재해 정부의 심사를 받는다.
  • 남능미 . . . . 1회 일치
          * 정부
  • 단기선교 . . . . 1회 일치
         유명한 것으로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선교에 나섰던 분당샘물교회 신도와 인솔자들이 [[탈레반]]에 납치당한 사건이 있다. 해당 일행은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으로 풀려났지만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 두명이 탈레반에 의해 처형되었다.
  • 단축 도메인 . . . . 1회 일치
         http://goo.gl/ - [[구글]] 운영, 한국에서는 이쪽에서 발행된 스팸이 워낙 많아 정부와 은행에서는 이 주소로 시작하는 주소를 절대 클릭하지 말라고 한다.
  • 대전광역시 . . . . 1회 일치
         정부대전청사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1회 일치
          * K3리그팀: 양평FC, FC 의정부, 부여FC, 전남 영광FC, 고양시민축구단
  • 돈가스 . . . . 1회 일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서양인의 체격을 따라잡기 위해 육식을 허용[* 일본은 675년부터 1872년까지 포유류 고기를 먹는걸 금지했다.]했다. 하지만 10세기 넘게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고기에 적응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 입맛에 맞는 고기 요리가 만들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돈가스다.
  • 드라콘 . . . . 1회 일치
         드라콘이 법률을 제정하기 10여년 전, 기원전 632년에 킬론(Kylon) 일파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는데, 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알크마이온(Alcmaeon) 가문의 사람들이 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 같은 사적 복수를 줄이고자 하는 목적에서 드라콘의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여겨진다.
  • 로어셰크 . . . . 1회 일치
         1977년에 킨 법령[* 작중에 등장하는 법안. 정부를 위해 일하는 히어로 외의 히어로 활동을 금지시켰다.]이 통과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활동하는 히어로. 특별한 초능력 없이 주변 기물과 격투술을 이용해 싸운다. 작중 사용한 도구라면 코미디언의 집으로 올라가는데 사용했던 작살총 정도.
  • 로켓레드 . . . . 1회 일치
          본명 조세프 데니소비치. 첫번째 로켓레드로 [[그린 랜턴]] 군단의 [[킬로웍]]과 친구였다. 그러나 정부에 의해 킬로웍을 배신하고, 그를 상대로 싸우다 사망했다.
  • 마이클 페이 . . . . 1회 일치
         여담으로 미 연방정부의 조치와는 달리, 정작 미국 일반인들은 마이클 페이가 태형에 당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환영(…)하는 여론도 있었다. 1994년 봄에 USA투데이가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인의 53%가 태형의 도입을 찬성했다. [[엄벌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의 경향 때문인듯.[[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7/27/2007072700998.html (참조)]]
  • 맥스 페인/줄거리 . . . . 1회 일치
         맥스는 펀치넬로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펀치넬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맥스가 총을 겨누자 펀치넬로는 어떤 여자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으며, 그 여자는 정부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목숨을 구걸한다. 하지만 맥스는 펀치넬로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 메탈멘 . . . . 1회 일치
         젊은 천재 박사 '윌 매그너스'는 인간이 드나들 수 없는 곳에서의 구조 임무를 위한 로봇을 말들어달라는 미 국방부에 명령에 따라 '리스폰스미터'라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낸다. 그 인공지능을 각자 다른 액화된 금속 안에 담가 창조해낸 것이 바로 '메탈멘'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그런 로봇을 만드려는 목적은 구조 임무 뿐 아니라 적이 되는 대상을 암살하기 위해서였고, 그 사실을 안 메탈멘은 살인을 거부하며 도망간다.
  • 몽키 D. 루피/작중행적 . . . . 1회 일치
         일단 현재 현상금은 4억 베리가 된 상황으로[*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은 에니에스 로비를 함락시키고 2억이나 올랐는데 그 후에 [[칠무해]][겟코 모리아]를 쓰러뜨리고 천룡인을 때리더니 [[임펠 다운]]의 첫 침입자가 되어 사상 최악의 탈옥사건을 일으켰으며 에이스의 수갑까지 푸는 업적을 세우고도 1억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모커(원피스)|스모커]]가 했던 말처럼 현상금 기준이 정말 애매한 것 같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2년동안 비밀리에 수련하면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던 루피가 위험도로 매기는 현상금이 갑자기 오를 리가 없다. 이제 다시 동료들과 합류해 활동 개시하면서 세계 정부(해군)와 신나게 치고 박는 상황이 전개될 테니 고로 현상금의 수직상승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628화에서 징베의 말에 따르면 3억을 넘어가면 현상금이 쉽게 오르지 않는다고 하니 단번에 1억이 오른 것만해도 대단한 일인 모습이다.], 여전히 바보라서 쵸파처럼 '''가짜 조로와 가짜 상디를 진짜 조로와 진짜 상디로 착각'''한다. 그래도 쵸파와는 달리 둘에게 변장한 게 아니냐고 묻기는 한다. 그러다가 그 가짜들의 안내에 또 다시 가짜 루피를 만나는데…
  • 문근영 . . . . 1회 일치
         2017년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이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가운데 한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아이디가 문근영에게 외할아버지의 일을 바탕으로 "빨갱이 이미지"를 덧씌워 비방했던 사실이 드러났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70398&iid=5054248&oid=032&aid=0002820225&ptype=052|[단독]‘문성근 합성사진’ 유포 ID, 비방글 무차별 양산…최근 일제히 삭제]]
  • 미스터 판타스틱 . . . . 1회 일치
         훗날 정부의 원조로 우주선 발사가 가능해졌을 때 리드는 우주 비행사가 된 벤과 성인이 된 수, 그리고 수의 동생인 자니 스톰(휴먼 토치 II)와 함께 직접 우주선을 타고 시험비행에 나선다. 그러나 리드의 예상치 못한 실수로 네 사람은 우주방사선에 노출되고, [[지구]]에 돌아온 뒤 그들의 육체가 변화를 일으킨 것을 알게 된 네 명의 초인들은 자신들의 힘을 인류를 위해 사용하기로 하고 '판타스틱 포'를 결성하게 된다.
  • 바키도/135화 . . . . 1회 일치
          * 그로부터 2주일 후 뉴욕의 어느 호텔. 역사적인 트럼프 행정부와 한마 유지로의 "불가침 선언" 채결일. 트럼프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 박경석(1937) . . . . 1회 일치
         1988년 [[노태우]]의 [[전두환]] 색깔 지우기로 인하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국정교과서(기업)|국정교과서]] [[사장]]에 임명되었다.
  • 박승효 . . . . 1회 일치
         * 1974년 6월 25일 정부에서 11개 대기업의 무허가 [[독극물]]제조를 적발, 11개 기업체 대표를 소환할 때 그는 사주 [[최종건]]을 대신하여 소환, 조사에 응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62500329207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6-25&officeId=00032&pageNo=7&printNo=8844&publishType=00020 ]</ref>
  • 박재옥 . . . . 1회 일치
         사실 박재옥-한병기 부부도 굳이 파헤쳐보면 위에 언급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등에 대한 특혜 의혹이 있지만, 그 외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구설수는 특별히 없다. 언론에서도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박재옥에 대해선 박근혜 친인척들의 행적을 파헤치면서 위의 케이블카 사업 특혜의 의혹 등에 대해 몇 차례 가볍게 다룬 것 외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 외에 박재옥의 사위인 박영우 회장의 대유그룹의 성장세가 굉장히 빨라서 [[김어준]]이 [[이명박]]의 [[다스 실소유주 논란|다스 논란]]과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248913|비교한 사례가 있었으나]] 다스 논란과는 달리 이 역시 흐지부지 묻혔다.
  • 박제균 (1887년) . . . . 1회 일치
         이후 경북 지역에서 [[청송군]], [[영덕군]], 의성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고, [[1933년]]에는 [[영천군]] 군수가 되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영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4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배성룡 . . . . 1회 일치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백계영 . . . . 1회 일치
         1270년(원종 11) 고려 정부가 원나라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고 삼별초를 해산하려 하자 [[배중손]]을 필두로 한 [[삼별초]]가 저항하였는데, 이때 몽고군에 항복을 원치 않던 군사들과 백성들이 [[진도]]의 [[삼별초]]에 가담하여 그 세력이 켜졌다. [[1271년]]([[고려 원종|원종]] 12) 1월 [[경상도]] [[밀성]](密城), [[금주]](金州) 등지의 농민들도 [[삼별초]] 군에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밀성]] 출신의 동정(同正) [[박경순]](朴慶純) 등 항쟁군들이 [[청도]]로 쳐들어와 병마사를 참칭하며 [[청도]] 감무(監務) [[임종]](林宗)을 죽이고 거병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청도]] 호장 백계영은 투항하는 척 이들을 환대하고 주연을 베풀어 안심시킨 뒤 아우인 급제 [[백이장]](白利章)과 함께 청도 군민을 동원하여 적수 [[박경순]]과 급제 [[조홍기]](趙弘祺), 진사(進士) [[박정서]](朴貞瑞)를 비롯한 일당 200여 명을 주살하고 폭동을 진압하였다.<ref>『동국통감』 권 36 고려기</ref> <ref>《청도군지》</ref>
  • 백일섭 . . . . 1회 일치
         * [[1980년]] 《[[남자 가정부]]》
  • 분류:경기도 출신 인물 . . . . 1회 일치
         [[분류:의정부시 출신 인물]]
  • 블랙 클로버/118화 . . . . 1회 일치
          발터는 릴에게 친구가 생기는건 전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라고 감격의 눈물까지 보였다. 릴이 옛날 얘길 꺼내지 말라고 투정부리는 사이 슬슬 시합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릴은 기합을 넣고 힘차게 시합장으로 향했다.
  • 사택 . . . . 1회 일치
         이다. 이 때문에 감가상각이 가해지지 않은 사택은 정상가격이 엄청나게 높아진 반면에 회사는 임대보증금을 적절히 조절하면 아주 간편하게 조세회피를 꾀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극단적으로 적정임대료를 회사가 대신 내 준다고 하면, 여기에 따른 비용은 회사가 직원을 위해 그만큼 지출을 감행한 것이 된다. 부동산 가치가 올랐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정부 입장에선 조세조달이 악화되니(...).
  • 살바도르 달리 . . . . 1회 일치
         달리는 부인 갈라가 죽고 7년 뒤에 사망했는데, 자식이 없어서 달리의 작품들은 스페인 정부에 유산으로 남겨졌다. 달리의 시신은 피게레스에 있는 극장의 지하실에 묻혔다.
  • 서거정 . . . . 1회 일치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直長)을 지내고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1478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 서명선 . . . . 1회 일치
         정조 때 [[이조판서]], 금위대장, 약방제조,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수어사]], 판돈녕부사를 했다.
  • 서병조 . . . . 1회 일치
         [[분류:1882년 태어남]][[분류:1952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 서씨]]
  • 서울특별시장 . . . . 1회 일치
         서울은 1946년「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하여,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중앙정부 내무부 소속으로 들어갔으며, 특별시로 승격하였다. 그와 동시에 경성부윤(府尹)이 서울시장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서울특별시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서훈 (1942년) . . . . 1회 일치
         [[대한민국 제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는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대한민국 제14대 총선|14대 총선]]에서는 [[통일국민당]] 공천으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1993년]] [[문민정부]] 초기에 [[공직자 재산공개]]로 [[박준규 (1925년)|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이 의원직 사퇴를 선언해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노동일]] 후보에 신승하면서 국회에 입성한다. 당시 지역감정이 억세기로 소문난 대구 지역 유일의 무소속 당선자여서 화제를 모았고, 자전거를 타고 국회에 출근하며 타 국회의원들이 언급하기 꺼려하는 국정사항에 대해 과감하게 질의하는 등의 소신 행보로 화제를 모은다.
  • 세속주의 . . . . 1회 일치
         [[정교분리]]를 통하여 [[종교]] 기관과 [[국가]] 정부 기관을 분리, 종교가 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 모든 종교가 국가의 법 앞에서 평등해야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국가를 [[세속국가]]라고 한다.
  • 소진은 . . . . 1회 일치
         [[분류:189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소씨]]
  • 손전 . . . . 1회 일치
         * 《[[여대생 가정부]]》
  • 송아영 . . . . 1회 일치
         [[이명박 정부]] 때 자유선진당에서 충청남도당 여성위원장, 뉴 선진비전 여성위원회 대표 등을 지내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비례대표제|비례대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5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될 때 합류하였고 새누리당 세종특별자치시당 대변인을 지냈다.
  • 송종익 . . . . 1회 일치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7화 . . . . 1회 일치
         지진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맥스웰은 TV인터뷰에서 슈퍼걸이나 정부를 믿을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슈퍼히어로 . . . . 1회 일치
         슈퍼히어로는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데 주로 자신의 주변인들에 대한 보복 우려나 일상생활의 보장 등의 이유가 있다. 만약 이 정체가 들통나면 무슨 사단이 벌어지는지는 불행 히어로의 대명사 [[스파이더맨]]의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작품에 따라서는 맨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영웅을 믿을 수 없다는 묘사가 나오거나 아예 정부에서 얼굴 보이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 스타 연구소 . . . . 1회 일치
         스타 연구소는 [[과학자]] 개리슨 슬레이트(Garrison Slate)가 설립했으며, '''정부와 기업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경을 초월한 연구소'''를 목표로 삼았다.
  • 식객 . . . . 1회 일치
         맹상군, 신릉군 같은 전국사군자는 수백명의 식객을 육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식객들은 이 귀족들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커지게 된다. 하지만, 점차 정부에서는 식객들을 위험시 하여 왕족이나 귀족이 식객을 두는 것을 정책적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 식극의 소마/185화 . . . . 1회 일치
          * 하긴 아자미도 이상한 야망 때문에 부정부패를 일삼는 인물이므로 제대로된 인간이 아니다--노답 일가--
  • 식극의 소마/216화 . . . . 1회 일치
          * [[시라츠 쥬리오]]는 재료선정부터 글렀다며 잇시키의 행동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인다.
  • 신경림(대학교수) . . . . 1회 일치
         시인의 1988년작 '[[가난한 사랑 노래]]'의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시귀는 본래 '[[탱크]] 바퀴 굴러가는 소리'였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 군사정부의 검열을 의식한 출판사의 만류로 수정했다고 한다.
  • 안숙선 . . . . 1회 일치
         * [[1998년]] 프랑스 정부 [[:en:Ordre des Arts et des Lettres|문예공로훈장]] 오피시에 수훈
  • 양시칠리아 왕국 . . . . 1회 일치
         양 시칠리아 왕국은 나폴레옹 시대의 [[헌법]]을 폐기하고, 나폴리에 있는 중앙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치하에 놓였다. 시칠리아에서는 자치를 요구하는 분리 운동이 시작되었다. 역대 왕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여, 민족주의나 개혁사상을 배척하고 오래된 사회, 정치 구조를 유지하려는 통치를 유지했다.
  • 역사 . . . . 1회 일치
         [[과거]]에 대한 기록이며 단순히 입소문 등의 수준이 아니라 큰 규모의 사건 등 영향력이 많은 일들이 기록된다.[* 단, 현대에는 기존의 정부나 단체, 공인의 기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이러한 단순한 특정 시기의 '소문'이나 소소한 일상사, 사물 등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검토하는 '미시사'란 개념도 생겨났다.] 이를 다루는 학문을 역사학이라 한다.
  • 영양군 . . . . 1회 일치
          * [[이재오]] - 프로필에는 [[강원도]] [[동해시]]라고 되어있지만 그것은 태어난 것뿐이고 실제 어려서부터 영양에서 살았고, 심지어 영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프로필 바꾼것도 TK이미지 벗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매일신문]]이 이재오가 네이버 프로필 출생지를 영양에서 동해로 바꾼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2인자였으니 영양 출신 중에서는 가장 잘 나간 사람이다.
  • 요코타 메구미 . . . . 1회 일치
         2014년 11월 07일, 동아일보는 1994년 4월 10일 요코타 메구미가 약물투여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했다.[[http://news.donga.com/3/02/20141107/67719661/1 (참조)]]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http://sp.m.reuters.co.jp/news/newsBodyPI.php?url=http://jp.reuters.com/article/topNews/idJPKBN0IR05920141107 (참조)]]
  • 우의형 . . . . 1회 일치
         1948년 태어난 우의형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고등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지냈으며 2003년에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장, [[청주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2005년에 변호사 우의형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2009년 7월 22일에 제17대 영남대 재단 이사장,<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7375.html]</ref> 2011년 11월 10일에 주식회사 화진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1101708138167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 우현(배우) . . . . 1회 일치
         물론 논란이 될 사항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가였던 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도 [[1987(영화)|1987]]에서 [[전두환]]의 심복이자 [[안기부]]의 수장이었던 [[장세동]] 역으로 출연했는데(...) 정작 문성근 씨는 진보 성향인데다 과거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또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시민단체|시민운동단체]]를 조직하는데 앞장서서 진보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현재도 [[진보]] 진영에서 여러 활동을 하지만 영화, 드라마 등 작품에서는 반대 성향의 역할을 맡아왔다([[군부]] 정권 시절의 친 정부 성향 경찰 간부나 [[정보기관]] 수장, 부패한 정치인, 언론인 등등). 본인 스스로도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그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라고 밝혔다.
  • 울진군 . . . . 1회 일치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진은 경상북도와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였는데, 지역적 성향 탓도 있지만 [[김중권]]이라는 지역 유명 정치인 때문이다. 1981년부터 3선을 달리고 이후 20년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6번이나 연이어 낙선했으나 매우 높은 득표를 보였다.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공천탈락 - "무당파국민연합" - [[김대중]]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 [[새천년민주당]] 대표 - 무소속의 길을 밟았으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도 먼저 "영남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 워터보딩 . . . . 1회 일치
         [[http://bostonkorea.com/news.php?mode=view&num=7071|보스톤코리아 - 부시 행정부 시절 고문 방법 공개]]
  • 위안부 소녀상 망치 테러 사건 . . . . 1회 일치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 소녀상 철거 반대! 대학생행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협상결과를 반대하고 특히 소녀상 철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2015년 12월30일부터 소녀상을 경비하고 있었다.
  • 유열 (가수) . . . . 1회 일치
         직접 제작한 어린이 뮤지컬 《브레멘 음악대》는 현재까지 70만명 관객돌파 흥행뮤지컬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2009년에는 [[독일]] [[브레멘]]주정부 초청공연,2011년 8월[[중국 상해]] [[국제 아동극 페스티벌]]에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 육홍균 . . . . 1회 일치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에 가입해, 회지 흑우,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 [[김중한]]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 선산군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
  • 윤길현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29일 수원 kt 원정 당시 연패중이던 팀 분위기를 무시하고 [[손승락]]과 새벽까지 나가 논게 같은 숙소에 자리잡은 팬이 보았고, 심지어 그 팬과 배달 음식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선수가 시킨 음식(족발세트)과 팬이 시킨 음식(통삼겹살과 냉면) 둘다 1층 로비에 있었는데 손승락과 윤길현이 팬의 음식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알고 들고갔고, 팬이 이를 알리자 "알아서 환불하라", "바꾸려면 우리 방 쪽으로 오라"[* 그나마 알아들은게 이 정도지, 실제로는 통화를 여러 차례하며 꽤 얘기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는데 술 취한 느낌의 경상도 사투리로 계속 횡설수설해서 --사실 이 정도면 그냥 주정부린건데-- 대부분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라는 적반하장식의 반응을 보였던 데다 이후 내려와서도[* 처음에는 팬과 그의 여자친구가 그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 층은 9층이라 그 층의 카드가 있어야만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건물 구조가 못 가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가란 말이야-- 그러자 호텔 직원에게 중재하여 그들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호텔 직원이 부르자 그제서야 나온 듯. 그리고 팬은 그게 손승락과 윤길현인 것도 직접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통화로는 그냥 경상도 남자들이 술에 취해 좀 무례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것.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iants_new1&no=3703421&page=1&exception_mode=recommend|당시 썰]]에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어 신빙성이 매우 높은 썰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iants_new1&no=3703613&page=1&exception_mode=recommend|500원 듀오]]라고 부르며[* 팬이 시킨 음식은 4만 500원 짜리였고 자신들이 시킨 음식은 4만원 짜리였는데 자신들이 팬의 음식을 계산해서 500원 더냈다는 말을 팬에게 수차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500원 문제가 무의미한게 팬은 바뀐 음식을 건드리지 않고 돌려줬고 먼저 가져간 선수들은 이미 음식 포장을 다 뜯어놓고 나서 들고 와서 비닐 봉지 안에 음식국물(삼겹살과 함께 시킨 냉면)이 엉망으로 흘러나와 있었다고 한다. --500원어치만 흘렸나-- 실질적으로는 팬이 당연히 더 손해. ~~그리고 억대연봉 받는 분들이 치사하게 500원 가지고 뭐라 그러는 것부터가...~~] 매우 큰 실망을 하고 있다.
  • 윤덕홍 . . . . 1회 일치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부총리]][[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구대학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동덕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윤태동 . . . . 1회 일치
         [[충주시]]가 윤태동의 생가를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생가에 정부가 돈을 쓴다는 논란이 일었다.[[https://archive.is/VRcc0|#]].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133번지에 위치한 이 [[한옥]]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윤양계(윤태동의 조부)가 1873년 지은 것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135호로 지정돼 지금까지 3억원 이상의 관리 비용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담당자는 인물과는 무관하게 건축양식의 가치를 기준으로 지정됐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 은혼/596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천도중은 오리무중 상태. 막부도 와해되어 무정부 상태가 다름없다.
  • 은혼/598화 . . . . 1회 일치
          * 그때 지구의 정부에서 사신이 왔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 은혼/599화 . . . . 1회 일치
          * 노부노부의 모델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실제 역사상으로도 도쿠가와 정권을 끝내고 메이지 정부로 권력을 이양한 인물이다. 대세를 잘 읽은 인물이라는 평과 정권을 말아먹은 인물이라는 평이 혼재된 편.
  • 은혼/600화 . . . . 1회 일치
          *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천도중의 괴뢰 정부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수장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프라이드 정도는 있는거 같다고 평가한다.
  • 은혼/602화 . . . . 1회 일치
          * 자작들은 그들의 태도가 괴뢰정부라고는 볼 수 없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약속을 했다.
  • 은혼/632화 . . . . 1회 일치
          * 마타코를 구한 반사이와 신스케는 사이좋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아무래도 상황은 그들이 생각한 거 보다 복잡했나 보다. 마타코는 신스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 그가 마타코와 접촉했던 걸 목격한 정부의 개, 다케치 헨페이타에 의해 꾸며진 함정이었다. 반사이는 벽을 사이에 두고 신스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신스케가 부추기긴 반사이가 부추긴게 아니었냐고 대꾸하자 그는 단지 살아있는 전설이 어떤 남자인지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본 남자는 이랬다.
  • 이갑상 . . . . 1회 일치
         대구 출신으로 1944년 9월 징병1기생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945년 2월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구강지구 중국군 제17사단에서 중앙군과의 합동작전에 참가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3월 30일에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던 중 중국 무호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28일에 일본군 제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분적당여죄로 징역 10년형을 판결받고 [[마포형무소]]에서 [[8.15 광복]]까지 수감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 이강철 (1947년) . . . . 1회 일치
         '''이강철'''(李康哲, [[1947년]] [[5월 6일]] [[대구]] - )은 [[대한민국]]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을 지낸 정치인이다.
  • 이경영(1960) . . . . 1회 일치
         너무 가볍지 않고 개그 캐릭터가 아닌 격조가 있는 [[중간보스]]급의 위치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주연급이라면 몰라도 조연급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판국이다. 그런데 이경영은 이미 90년대부터 격조 있는 주연으로 다작을 하면서도 연기력이 좋다는 평가를 꾸준히 유지했던, 그야말로 탁월한 실력이 있는 배우라서 그런 상황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연급은 아니어도 조연급으로는 여기저기서 캐스팅되고 있다. 또한, 이경영이 선역부터 악역을 비롯한 개그 캐릭터까지 다양하게 맡을 수 있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것도 이유이다. 특히 2010년 이후 한국 영화에서는 정계나 재벌의 부정부패를 다룬 느와르, 스릴러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영화에서 반드시 나오는 '부패한 높으신 분들' 연기로는 이경영이 연기력이나 이미지 면에서 매우 적합하다.
  • 이기백(군인) . . . . 1회 일치
         [[1931년]] [[충청남도]] 연기군(現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전두환]],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이다.
  • 이기택 . . . . 1회 일치
         === [[문민정부]] 시대 ===
  • 이서진(배우) . . . . 1회 일치
         금융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이보형 전 [[SC제일은행|제일은행]]장[* 임청각을 되찾는데 노력한 인물로 사후 국가에 헌납한 인물이다.], [[서울은행]]장을 지내고 아버지가 안흥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지낸 금융인이다. 집안은 안동의 고성 이씨[* 고성 이씨의 유명한 인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인 [[이상룡]] 선생이 있다.] 탑동파 가문이다.
  • 이시영 (1882년) . . . . 1회 일치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부|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 이원형(1951) . . . . 1회 일치
         [[이명박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 이인민 . . . . 1회 일치
         [[1392년]] 7월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직(李稷)이 개국공신(開國功臣)ㆍ좌명공신이 되어 태조(太祖) 때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증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판이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判吏曹事監春秋館事)에 [[추증]]되었다.
  • 이장섭 . . . . 1회 일치
         * [[2017년]] [[6월 10일]]<ref>[http://news.joins.com/article/21653324 충북 출신 이장섭·유행렬 청와대 비서실 '입성'] 중앙일보 2017.06.10.</ref> ~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산업정책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사관]]급)
  • 이정무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DJP연합]]에 따른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정|공동정부]]의 몫으로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이정우 (1950년) . . . . 1회 일치
         '''이정우'''(李廷雨, [[1950년]] ~ )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로,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이정재(영화배우) . . . . 1회 일치
         [[암살(2015)|암살]]에서 두얼굴의 임시정부 요원 염석진으로 나온다. 역할을 위해 무려 15kg이나 감량했다고 한다. [[조진웅]]의 증언에 의하면 촬영이 끝나고 배우들끼리 같이 밥 먹을 때 김치를 물에 씻어 먹는가 하면, [[하정우]]가 촬영 후 같이 술 마시자고 계속 꼬드겨도 끝까지 술 한방울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염석진의 불안하고 날카로운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48시간 무수면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하니, 연기에 대한 이정재의 열정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고생에 보답하듯 [[암살(2015)|암살]]이 8월 15일 광복절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도둑들]]에 이어 두번째 천만 영화를 갖게 되었다.
  • 이종배(국회의원) . . . . 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19~20대 국회의원[br]제35대 [[충청북도]] [[충주시]]장(민선5기)[br][[행정안전부]] 제2차관[br]행정자치부 차관보[br]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br][[충청북도]] 행정부지사[br]충청북도청 기획관리실장[br][[충청북도]] 청주시 부시장[br][[대통령비서실]] 행정비서관[br][[충청북도]] [[음성군]]수(관선)[br]제23회 행정고시 합격 ||
  • 이창동 . . . . 1회 일치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9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장관]][[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수훈자]]
  • 이카르부스 . . . . 1회 일치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공산화]]되며 정부에 의해 가압류 당한다. 이와 함께 코노비치 형제를 비롯한 경영진도 "나치 독일에 대한 경제적 협조" 혐의로 몰수형을 받게된다. 이 와중에도 이카루스는 [[이카루스 아에로 2B]]의 설계를 끝내지만 결국 국가에 의해 완전히 몰수, 1948년 공기업이 된다. 공기업이 된 이카루스는 폭격기인 [[https://en.wikipedia.org/wiki/Ikarus_214|이카루스 214]]나 단발전투기인 [[https://en.wikipedia.org/wiki/Ikarus_S-49|이카루스 S-49]],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제트기인 [[https://en.wikipedia.org/wiki/Ikarus_451|이카루스 451M]] 등을 설계한다. 이카루스 451의 개량형인 이카루스 W-451MM은 1957년 세계 최고 속도를 달성하기도 했다.
  •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 . . 1회 일치
         이케다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의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교내에 수상한 사람이 침입하여 난동을 벌이는 것을 가장한 훈련을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이케다 초등학교에서는 추모비가 세워지고 「기도와 맹세의 모임(祈りと誓いの集い)」이 발족하여, 매년 6월 8일 유족을 중심으로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정부는 학교의 안전관리가 미흡했음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총 4억엔을 배상했다.
  • 이헌일 . . . . 1회 일치
         *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사후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이희근 (1929년) . . . . 1회 일치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국방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전두환]][[분류:백선엽]][[분류:박정희]][[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심대평]][[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장대환 . . . . 1회 일치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흥덕 장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매경 미디어 그룹]][[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로체스터 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뉴욕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김대중 정부]][[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장민호 (1962년) . . . . 1회 일치
         * [[1992년]]~[[1998년]] 재벌 L기업 최연소 팀장, 정부의 한-미 IT기업 간 교류 참여
  • 장성환 . . . . 1회 일치
         [[분류:192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태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교통부 장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기후 대학 동문]][[분류:도야마 대학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국방연구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장]][[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공군무관]]
  • 장순왕후 . . . . 1회 일치
         ***** 올케 : 좌찬성 한성군 안소공 이훈(左贊成 韓成君 安昭公 李塤, 1429∼1481)의 딸 정부인 한산 이씨(貞夫人 韓山 李氏)
  • 장혁주 . . . . 1회 일치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9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재일 한국인]]
  • 재호 (배우) . . . . 1회 일치
         | 사당보다 먼 의정부보다 가까운
  • 전병조 . . . . 1회 일치
         * 기획재정부 본부국장
  • 전숙희 . . . . 1회 일치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펜중앙위원회에서 국제 종신 부회장으로 선임됐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독일 괴테문화훈장, 러시아 푸슈킨 문화훈장 등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절대가련 칠드런/448화 . . . . 1회 일치
          * 본래 정부군에 접근했었는데 그쪽은 강대국에 보낼 돈 밖에 없다고 상대해주지 않았고 이번엔 반군 쪽에 세일즈를 하러 왔다.
  • 절대가련 칠드런/450화 . . . . 1회 일치
          * 효부를 노리는 정부군의 헬기.
  • 절대가련 칠드런/452화 . . . . 1회 일치
          * 그들은 감시위성 광속의 여신(라이트 스피드 가데스)도 소유하고 있는데 자위대 등 일본 정부를 감시하고 있다.
  • 절대가련 칠드런/463화 . . . . 1회 일치
          * 한때 일본 정부는 "전 에스퍼 등록격리법안"이란 것을 추진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에스퍼를 등록, 격리해서 관리한다는 방침으로 명목은 비 에스퍼 국민의 안전. 당연히 에스퍼를 보호하는 BABEL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키리츠보 타이조]]는 단숨에 테이블을 엎으려 격분.
  • 절대가련 칠드런/470화 . . . . 1회 일치
          * 일본 정부도 에스퍼관리 및 규제 법안을 상정했고, BABEL의 [[키리츠보 타이조]]국장과 [[카시와키 오보로]] 대위는 다시 세뇌되어 찬동.
  • 정동기 . . . . 1회 일치
         * 2009년 9월 ~ 2011년 1월 : [[정부법무공단]] 이사장
  • 정만조 . . . . 1회 일치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개화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정명훈 (지휘자) . . . . 1회 일치
         [[1968년]]에 [[미국]]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1974년]]에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2위로 입상해 화제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만찬에도 초대되었다고 한다.<ref>{{뉴스 인용|제목=김문관의 클래식 산책 스승의 노래|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39830|출판사=아시아투데이|날짜=2012-05-14}}</ref> 이 만찬에서 정명훈은 콩쿨 상금으로 [[러시아]]에서 산 [[캐비어]] 5 kg 중 일부를 [[선물 (물건)|선물]]로 들고 갔다. 당시 소련 정부는 국부 유출을 금지해서 받은 상금을 [[모스크바]]에서 모두 써야 했다.</ref> 이듬해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추가로 [[공부]]한 후 [[1978년]]에 [[졸업]]했다.
  • 정문성 . . . . 1회 일치
         * [[2013년]] [[SBS]] 《[[수상한 가정부]]》 - 이태식 역
  • 정종철 . . . . 1회 일치
         * [[2013년]] 의정부보훈지청 나라사랑 홍보대사
  • 정형돈 . . . . 1회 일치
         * 2011년 [http://www.highcut.co.kr/ebook/view.php?seq=58&sub_cate=Main&sub=2#ebook_cate 《하이컷 58호》] - 미사리 조정경기장 선착장 '무한도전 조정부' : 인터뷰 (7월 30일)
  • 제주특별자치도 . . . . 1회 일치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
  • 조길형(1962) . . . . 1회 일치
         경찰대학 졸업 후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충남[[지방경찰청]]장, 강원[[지방경찰청장]], [[중앙경찰학교]] [[교장]], 안전행정부(현 [[인사혁신처]])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 진격의 거인/88화 . . . . 1회 일치
          * 왕당파 잔당의 아들이었던 크루거는 가족들이 마레 정부에게 산 채로 불살라진 후 복수를 다짐하며 당국에 숨어들었다.
  • 진종채 . . . . 1회 일치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 때 사위인 조준웅 검사[*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 진창현(음악인) . . . . 1회 일치
          *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으로 일본에 건너온 뒤 계속 눌러 살면서 [[조선적]]을 고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방문했을 때도 생각치 못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후에도 한국 국적으로든 일본 국적으로든 전환하지 않고 계속 무국적이나 다름없는 조선적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 때 [[종북주의자]] 수준으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조선적 소지자이면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등 북한계 단체와는 접점이 없이 악기 제작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국적 문제로 말썽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조센징'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여느 교포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차별은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현악기 장인이었음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상훈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인 듯 보인다.
  • 차금봉 . . . . 1회 일치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차명진 . . . . 1회 일치
         * 2011년 [[10월 11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를 "양아치", "삥" 등의 적절한을 총동원해 원색적이 비난해서 논란이 됐다. "박씨는 한 손으로 채찍을 들어 재벌들의 썩은 상처를 내리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삥을 뜯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해왔다. 이는 악어와 악어새의 동거"라며 "시민운동이 아니라 저잣거리 양아치의 사업방식"이라고 박원순 후보를 양아치로 규다했에 대해 투명하게 재정상태를 공개해온 시민운동단체의 활동을 양아치로 묘사한 것에 많은 공가이 어다
  • 차희식 . . . . 1회 일치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f>[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08356 화성 3·1운동 주도… 차희식 선생을 아시나요], 경인일보, 2010년 3월 23일</ref>
  • 참군인 . . . . 1회 일치
          * 군인으로서 보유하게 되는 무력을 악용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라면 [[쿠데타]] 등에 협조적이지 않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호한다.
  • 창작:블랙 마켓 . . . . 1회 일치
         나름대로 경제학을 도입했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 독과점 등의 당연한 개념은 물론 구제금융이나 가격정책 등 중앙정부가 할 법한 상황들도 벌어진다. 게다가 일반적인 전화번호부처럼 업종별 연락처 리스트가 존재할 정도로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다. 또한 시장답게 항상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 창작:좀비탈출/0 . . . . 1회 일치
         전기와 통신이 살아있을 무렵 두 사람이 있는, 그렇게 추정하는 지역이 '''위험구역'''으로 선포되는 뉴스를 봤다. 정부는 이 일대를 통제할 것이고 더이상의 '''사태 확산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녀석들은 착실하게 진군해서 그날 저녁 때쯤부터 우리 동네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잠그고 커튼도 쳤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주로 체리필터였고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끄지 않았다. 나는 조명도 끈 상태에서 혼자 지냈다. 공복과 수면의 사이클이 몇 차례 지나가고 가끔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나 비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그게 내가 열어줘야 했을 사람들이 아니었기만을 빈다.
  • 천해성 . . . . 1회 일치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조정실 정책담당관으로 근무했고, 통일부로 돌아와서는 회담기획부장으로 일하면서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다수의 남북회담에 깊숙이 관여했다.
  • 청송군 . . . . 1회 일치
          * [[김옥숙]](1935~) : [[노태우]] 전 대통령 영부인
  • 최남선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동주 최씨]][[분류:철원 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최만린 . . . . 1회 일치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조각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수원 최씨]][[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추계예술대학교 교수]][[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유교 이탈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영삼]][[분류:이회창]][[분류:김종필]][[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백선엽]][[분류:심대평]][[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분류:프랫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
  • 최서일 . . . . 1회 일치
         190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ref>통천최씨 족보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도쿄 대학|동경제국대]] 수산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산업기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주)조선수산개발 사장으로 사업을 펼치다 공직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수산국장과 초대 해무국장을 지냈다. [[1960년]] 해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완도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제 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70년에 사망하였고, 묘는 양주군 모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최순달 . . . . 1회 일치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4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한국과학기술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우주 개발]][[분류:우주 개발 선구자]][[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최영희 (1921년) . . . . 1회 일치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휘문고등학교 동문]][[분류:군사영어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센슈 대학 동문]][[분류: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터키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수성 최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최원명 . . . . 1회 일치
         * 《사당보다 먼 의정부보다 가까운 시즌 2》 (2017년, 웹드라마) - 남사랑 역
  • 최진순 . . . . 1회 일치
         대학 출강 외에도 법무부, 보건복지가족부 등 정부부처는 물론 국내 대다수 언론사에서 특강과 자문을 맡고 있다. 또 [[MBC]] TV속의TV, 다큐멘터리 [[KBS]] 미디어인사이드 등에 출연하였다. 2013년 [[연합뉴스]]는 뉴미디어를 이끄는 사람들 연재물에서 최진순을 소개했다.
  • 츠츠모타세 . . . . 1회 일치
         이 단어는 "[[부부]]나 내연 관계에 있는 남녀가 공모하여, 남자가 '아내' 혹은 '정부'에게 다른 남자를 유혹하게 하여, [[간통]]을 저지르고, 그것을 명목으로 하여 그 남자에게 돈을 뜯어내게 하는 [[사기]] 행위"를 뜻한다.
  • 카리아게 . . . . 1회 일치
         정부가 민간에서 부동산 등의 물건을 빌린다는 의미.
  • 캡틴 아톰 . . . . 1회 일치
         DC로 오면서 설정이 대폭 바뀌는데 에너지를 방출 및 흡수하는데다 에너지 파장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쓸 수 있다. 이름이 너새니얼 크리스토퍼 애덤(Nathaniel Christopher Adam)으로 바뀌고, 과학자가 아닌 공군이 되었다. 아담은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하는 대가로 모종의 군사실험에 참여한다. 그런데 모종의 군사실험이...추락한 외계인 우주선을 핵폭탄으로 날리는 것. 아담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는데, 18년 뒤 외계 금속으로 코딩(?)한 신체와 초능력을 가진 채 등장했다. 이후 사형드립협박을 받아 어용관제 히어로(...)가 된다. 미 정부는 모든 기록을 날조하고 캡틴 아톰을 저스티스 리그에 침투시켰는데, 아담은 보기 좋게 즐 때리고(...) 히어로 길을 걷는다.
  • 특이한 세금 . . . . 1회 일치
          * 벽돌세 : 1700년 도입. 1850년 폐지. 벽돌에 과세한 세금으로서, 건축가들은 좀 더 큰 벽돌을 써서 세금을 줄이려고 했으며, 정부는 더 큰 벽돌에는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 프레퍼 . . . . 1회 일치
         2012년 [[미국]]에 가장 많이 존재하며, 300~4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나 [[매스미디어]]를 믿지 않고, 국제 자본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매스미디어보다는 지역 커뮤니티나 라디오, 인터넷 등의 커뮤니티를 선호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이웃도 적으로 간주하고, 고립된 생활을 한다.
  • 한승주 (공무원) . . . . 1회 일치
         [[분류:194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고려대학교 총장]][[분류:욱일대수장 수훈자]]
  • 한호문 . . . . 1회 일치
         할아버지는 [[배천군|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고 [[증직|증]]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과 서림군(西林君)에 증직된 한창서(韓昌緖)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충의위]](禦侮將軍 忠義衛)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형판(刑判)을 지내고 사후 [[증직|증]]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贈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서원군(西原君)에 추증된 한강(韓綱)이고, 어머니는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지중추부사 이전(李晉+戈)의 딸이다. 형제로는 한선문, 한의문, 한사문 등과 칠계군 헌민공 [[윤탁연]]의 아들 윤길원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 한강보다 앞서 사망하였다.<ref>경기도, 《경기금석대관 2》, (경기도 편역, 1987) 한양위 묘갈편</ref>
  • 함병춘 . . . . 1회 일치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 및 잇달아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 12월 31일 하오, 한국 정부는 함병춘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을 [[주미 한국 대사]]로 임명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10400329201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1-04&officeId=00032&pageNo=1&printNo=8698&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에 咸秉春씨 임명 | 날짜 = 1974-01-04| 출판사 =경향신문 }}</ref> [[1974년]]에 주미 대사로 부임하였다.
  • 함은정 . . . . 1회 일치
          * 리더이다 보니 [[무한도전]]의 고유명수 [[박명수]]처럼 항상 함은정부터 멘트를 시작하고, 소개를 시작한다. 각종 행사에서도 마이크는 함은정이 잡는다. 리더가 아닌 현 시점에도 현 리더 [[큐리]]가 아닌 은정이 멘트를 하는 경우가 다분한 정도.
  • 함익병 . . . . 1회 일치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강릉 함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김영삼 정부]]
  • 헌경왕후 . . . . 1회 일치
         ***** 서모 : 정부인 김해 김씨(貞夫人 金海 金氏)
  • 현재현 . . . . 1회 일치
         현재현 회장은 1980년대 금융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한민국에 선물•벤처투자 등 선진금융기법을 도입해 21세기 국가기간산업인 금융산업의 선진화에 기여하며 제조업 중심의 동양그룹을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인해 종금, 보험, 투신업계에 무려 약 34조 9천억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지만, 동양그룹의 모든 금융계열사는 공적자금 지원 없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특히, 동양오리온투자신탁(현 동양증권)은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대우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약 5,000억 원의 고객 손실을 전액 보전해주었다. 사회공헌차원에서 금융업을 제2의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온 현재현 회장의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동양생명은 부실한 태평양생명을 인수 합병하여 생명보험사 구조조정에 힘을 보탰다. 2007년 한일합섬 인수 이후 현재현 회장은 레저사업을 동양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기존의 골프장 사업에 리조트사업을 추가하고 강원도 삼척시와 연계한 레저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현재현 회장은 시멘트사업 중심의 그룹 제조부문을 친환경 에너지•자원 개발 기업으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현 회장은 1989년 그룹 회장 취임 당시 매출 6,000억 원의 동양그룹을 제조•금융•서비스 부문 33개 계열사에 연 매출 9조 2,211억 원 규모로 성장시켰다.
  • 홍경인 . . . . 1회 일치
         특히 [[박광수(영화 감독)|박광수]] 감독과 함께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그 해 [[씨네21]]에서 설문조사한 '최고의 남자배우'부분에 [[안성기]]와 공동으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시 [[충무로(은어)|충무로]] 톱스타였던 [[안성기]]는 다작 출연으로 인기가 내려가기도 했으나, 그래도 부동의 원탑이었던 시기였다. 이 외에도 각종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시절로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노동문제등에 관심이 크던 시기인지라 당시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컸다고 한다.] 분신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이것은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배우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었는데 당시 기술이 부족했던 국내 여건상 호주의 특수효과 전문가를 섭외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최초로 사용했던 기법이 할리우드에서나 쓰던 '워터젤'을 몸에 바르고 불을 붙이는 기법.[* 훗날 이는 한국에서도 수많은 화재 재난 영화에서 쓰이게 된다. 영화 전태일의 성공 덕분이었다. --근데 어설프게 써서 조금 다친 배우들도 있었다고..--] 그 전문가 曰 "우리 나라에서도 주연 배우가 몸에 이 정도 양의 불을 붙인 적은 없었다." 라고 호평을 했다고 한다.
  • 홍세화 . . . . 1회 일치
         그 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체류 중 [[망명]]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망명자로 인정받았고,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망명생활을 하며 집필, 기고활동에 종사하였다. [[1995년]] 자서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하고,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 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 홍양호 (1955년) . . . . 1회 일치
         * 통일부 경수로기획단 정책조정부
  • 홍은희(배우)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여배우.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 출신으로 1998년 MBC 27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였다. MBC 베스트극장에서 [[강호순]]과 함께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려 11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였다. 결혼식을 [[3.1절]]에 하여 식장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남편 강호순은 만세삼창을 하였으며, [[신혼여행]]도 [[상해임시정부]]로 갔다고 한다. 결혼 후 한동안 [[육아]]에 힘쓰며 연예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복귀하여 드라마, 예능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홍헌표 . . . . 1회 일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화완옹주 . . . . 1회 일치
         [[1749년]](영조 25) [[7월 6일]] [[소론]]의 거두 [[정휘량]]의 조카이자 이조 판서와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였다. 정우량은 [[우의정]]까지 지냈고,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달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자 시댁 일가의 아들인 [[정후겸]]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 황종률 (정치인) . . . . 1회 일치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1972년 죽음]][[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재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충청북도지사]][[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규슈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평해 황씨]]
  • 황희두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서울시가 주최한 [['광장은 시장실']]에 참석하여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e스포츠]]의 발전과 게임 문화의 인식 개선을 제안하였고 체택되었다. 학부모들과 청소년들에게 게임 문화가 마냥 안좋은게 아니란걸 알리기 위한 목적과 또한 중국 시장에 밀려 뒤쳐진 대한민국 e스포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다. 실제 2014년도 기준으로 중국은 약 4조원대의 금액을 [[e스포츠]]에 투자하며 세계 e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였으며, 정작 e스포츠의 종주국인 대한민국은 점차 중국에 밀리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현직 프로게이머, 게임단 관계자, 지자체, 정부 등과 협력하여 '대한민국 e스포츠 시장 살리기'를 추진중이다. <ref>http://www.sportsseoul.com/news/read/417966|턱 밑까지 쫓아온 중국...한국 e스포츠는 어디로?
  • 히모 . . . . 1회 일치
         [[일본어]]에서 히모는 일반적으로는 '끈'이라는 뜻이다. 남녀관계에서 속칭으로 쓰일 때는, 여성을 일하게 하고 자신은 그녀가 주는 돈으로 놀고 먹는 [[정부]]를 뜻한다. 정식으로 혼인관계를 맺으면 히모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농담이나 놀림삼아 불릴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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